요즘 요한계시록 매일성경 묵상이 쉽지 않으시죠?
본문 옆에 있는 해설을 참고해서 읽으시면 무난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먼저 요한사도가 기록하던 당시의 상황과 조만간 일어날 환난이라는 걸 우선 고려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성경시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중복적으로 적용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또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패턴으로 진행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내용은 현재 우리 시대에도 주시는 말씀인 것이죠.
지난 번에는 일곱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교회가 전해졌죠.
이후 어린 양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계시록에서 심판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우리 생각과 좀 다르죠.
그동안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으로 지구역사는 종결되고 구원과 심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땅에서는 주님의 교회와 사탄의 대결이 계속 이어집니다.
1. 오늘 본문은 로마제국 당시 1세기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박해에 대한 예언입니다.
앞부분을 참고해야 본문을 알 수 있습니다.
13장에는 용과 짐승, 그리고 또 다른 짐승, 박해받는 성도들이 나옵니다.
요한사도는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탄을 용으로 비유합니다.
사탄의 계략을 시행하는 현실 권력자 로마황제는 짐승으로 비유합니다.
그냥 사탄이다, 황제다, 하면 쉬울 텐데 왜 동물로 표현했을까요?
이유는 이 서신이 소아시아에 있던 여러 교회에 회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명이 기록된 편지가 외부에 유출되면 교회가 단번에 멸절될 위험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죠.
본문은 11절부터 보아야 이해가 됩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또 다른 짐승이라 함은 앞에 먼저 나온 짐승이 있었다는 것이죠.
사탄인 용은 시대별로 짐승을 일으키고 그걸 이용해 교회를 박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보면 용이 조종하는 또 다른 세력들도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 세상 임금, 음녀 등이 교회를 미혹하는 세력들입니다.
박해로만 성도들을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거짓 종교로, 세상적인 것과 쾌락으로도 성도들을 넘어뜨립니다.
오늘 본문이 굉장히 난해해 보이지만 로마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면 쉽게 해석이 됩니다.
15절을 보면 새로 나타난 짐승은 먼저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인다고 하죠.
당시 역사에서 자살한 네로황제와 그 이후 기독교 박해로 악명 높은 도미티아누스황제가 자행한 일과 일치합니다.
네로의 죽음으로 세력을 잃던 황제의 권력이 도미티아누스 때 다시 강력하게 부활한 것을 말합니다.
2. 이 두 번째 짐승은 모든 사람에게 표를 받게 합니다.
16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여기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14장1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도들도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하죠.
성도들 이마에 예수님의 이름이 찍혀있지는 않잖아요?
누구에게 영혼을 맡겼느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영혼을 맡기지 않으면 어떤 짐승에게 영혼을 갖다 바칠지는 시간문제입니다.
16절에서 짐승이 ‘모든 사람’에게 표를 받게 했다고 하잖아요?
이 짐승의 표가 없는 사람들은 매매할 수 없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에 살던 로마 식민지 국민들은 일 년에 한 번 황제의 제단에 참배하고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그 증명서가 없이는 도시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경제 활동을 못하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7절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어느 시대든 먹히는 사탄의 최고 전략은 물질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3. 여기서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인 666이란 숫자가 나옵니다.
18절,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666이란 숫자는 사람들에게 왠지 두려움을 주죠.
그러나 총명한 사람은 그 짐승의 이름의 수를 세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죠.
이 말은 이 짐승의 이름이 그때 사람들에게 다 알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철자마다 고유 숫자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한글로 설명하자면 ㄱ은 1, ㄴ은 2, ㄷ은 3, 이런 식으로 고유 숫자를 붙였다는 것입니다.
현재 사탄의 권세를 받은 짐승이 누군지를 알려면 그 이름의 스펠링을 숫자로 환산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 숫자를 합치면 666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는 고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20여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사라진 로마제국의 폼베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화산재에 파묻혔던 이 도시가 발굴되며 세상에 모습이 드러났죠.
그중 한 벽에서 이런 글귀가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그의 이름이 545인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가 누구인지 감추는 듯하며 힌트를 주는 것이죠.
요한의 편지를 본 성도들이 누군가를 떠올리고 재빨리 이름값을 계산했다면 그 사람은 단연코 네로황제일 것입니다.
황제 네로를 히브리어로 바꿔서 철자가 가진 숫자를 합치면 정확히 666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666이 되려면 철자 하나를 빼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짐승의 표가 황제숭배와 관련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666이 황제의 이름값과 일치하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박해자의 이름을 알리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죠.
하나님의 숫자인 7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숫자 6, 그것도 세 번 반복함으로 완전히 그렇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황제가 아무리 자신의 이름 앞에 ‘신’이라는 칭호를 붙여봤자 인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황제숭배의 올가미가 점점 목을 조여오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그것을 기억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견뎌야 할 환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시대 에베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제목이 ‘에베소에서 보낸 일 주일’입니다.
미국의 신학교 교수가 에베소에 대한 최신 연구 결과와 고고학의 증거들을 기반으로 쓴 소설입니다.
시간적 배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종교축제 기간입니다.
에베소는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황제들의 신상이 내려다 보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도시는 황제와 여신을 숭배하는 찬가로 가득했습니다.
이 도시의 풍요가 그들의 덕분이라고 숭배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성도들의 갈등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제가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 갔을 때 온 도시에 가득한 절을 보며 그런 짓눌림을 실감했었습니다.
소설에서는 그 에베소 성도들에게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요한이 이 계시록 서신을 보냅니다.
세상의 주권자가 누구신지, 그리고 악한 권세자들의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며 성도들을 강하게 권면하려는 것이죠.
사탄의 역사가 그만큼 강하기에 요한계시록도 강력한 심판의 단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끝까지 황제 숭배를 거절한 사람들이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댓가를 소설은 보여줍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짐승이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마흔두 달이라는 극히 제한된 시간이란 것이죠.
우리의 모든 환난도 하나님의 제재 아래 있고 끝나는 시간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계시록 시대엔 로마황제였지만 우리 시대 짐승의 표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일어났던 일이죠.
일제강점기나 6.25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전남 영광의 야월교회는 공산당에 의해 성도 65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짐승과 짐승의 표는 한 사람이나 한 사건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시대에 예수님을 대적하는 조직, 이념, 권력, 인간, 그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최근엔 인공지능 AI가 그런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원로목사님이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신앙의 영역은 절대로 AI가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과연 그럴까요?
작년에 교황청 허가로 스위스 로체른성당에서 AI 종교 텍스트를 실험했습니다.
천주교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죠.
피실험자들에게 상담자가 AI 예수님이라고 알린 뒤 기계 속의 신과 대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험 결과에서 교황청은 어떤 위기감을 포착합니다.
무엇일까요?
참여한 신자들이 AI 신에게서 종교적인 은혜를 체험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쳇지피티에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서 한번 물어봤습니다.
둘을 비교해 주더니 결론은 진화론이 더 과학적이다라고 내놓더군요.
그건 명백한 거짓입니다.
진화론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AI가 일반적인 답을 주고 기독교 신앙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급진적으로 발전하는 사회를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것들이 사탄의 도구로 쓰이게 될지 누구도 모릅니다.
정신차리고 있지 않으면 어떤 짐승에게 넘어가 표를 받을지 모르는 것이죠.
5. 반면에 14장에는 어린 양과 하나님아버지의 이름의 인을 맞은 십사만사천의 성도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4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자며
십사만사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 숫자를 상징합니다.
짐승은 시대마다 다른 종류가 등장해서 영혼을 약탈합니다.
황제숭배, 진화론, 종교통합과 수많은 이단들에 영혼이 팔려나갑니다.
최근 가평군 일대를 통일교가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한 지역의 영혼 전체를 사이비 종교가 약탈할 수 있는지 참담합니다.
사람들이 영혼을 내어 준 짐승의 수는 역사 속에서 다 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단 한 분 예수님만 따릅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만 따르고 있습니까?
칼의 위협이 내 앞에서 배교와 순교를 선택하라 할 때 우리는 속으로는 믿지만 겉으로는 배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주님의 이름을 가진 우리가 구원에서 탈락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큰일도 아닌 일상에서 내 믿음을 계속 굴복한다면, 과연 내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따르는 그 십사만사천에 들어가는지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부디 아직 준비할 수 있는 지금, 우리 믿음을 강하게 하고 시험의 때를 대비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5년7월23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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