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 하나님말씀 >
  • 주일예배설교
강권하시는 사랑 (고린도후서5장11절-21절)
남수연 2025-07-22 추천 0 댓글 0 조회 42

고린도후서에는 예수님과 성도들을 위한 바울사도의 피, ,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대로 살았던 것이죠.

보통의 성도 입장에서 바울의 그런 믿음은 나하고는 격차가 너무 크죠.

우리도 내 믿음과 형편대로 주님께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바울처럼 온전히 내 삶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까?

사실 나를 위해서 살기도 벅찬 게 현실이잖아요?

바울사도와 사도의 편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명예의 전당에 높이 보존하라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에서 말씀했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오늘도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배우고,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조금씩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바울의 이런 헌신의 이유와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힙니다.

고린도전후서는 단순한 안부 편지나 신앙교육을 위해 쓰여진 게 아닙니다.

편지를 쓰게 된 특별한 배경과 이유가 있었죠.

그걸 고려하지 않으면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13절만 해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죠.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어떤 이들이 바울을 미쳤다고 했다는 것이죠.

누구겠습니까?

바울은 본문 편지에서 계속 어떤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추천서를 들고 다니며 율법을 전수하고, 바울사도를 능멸하는 순회전도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사도보다 거룩해 보였습니다.

종교가 원래 그런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바리새인들이 겉보기에 훨씬 더 엄숙해 보였잖아요?

반면 바울사도는 고린도에서 늘 앞치마를 두르고 천막 일을 했죠.

그러면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뭔가에 모든 것을 다 건 사람을 보면 미쳤다고 하잖아요?

그런 바울을 깎아 내리며 미쳤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행전26장에도 유대인들의 고소로 재판을 받던 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과 주님이 죄인들을 위해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증언합니다.

그때 베스도총독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세상사람들에게 복음은 말을 안해서 그렇지, 미친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 복음에 목숨을 건 바울은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봉사할 때 주변에서 미쳤다고 할 정도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이 미쳐 보이든, 온전해 보이든, 오직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1)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바울을 극한 헌신으로 몰아가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사랑 외에 바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녀를 낳고 기를 때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물론이지만 성장한 뒤에도 마음에서 놓지 못합니다.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하기로 했던 한 어머니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고관절이 부서졌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자기 부상은 안중에도 없고 이식날짜가 미뤄질까 전전긍긍하는 이 어머니를 위해 병원이 무리해서 응급수술을 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건강한 신장을 아들에게 주기 위해 나이든 어머니가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부모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래전 로렌조 오일이라는,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외아들 로렌조에게 여섯 살 때 유전병이 나타납니다.

부신 대뇌백질 위축증이라는 희귀한 병입니다.

지방이 대사되지 않고 몸 속 여러 부위에 쌓이는 병입니다.

지방이 신경과 장기, 혈관에 들러붙어 죽게 되는 것이죠.

치료약이 없었습니다.

이 병이 발병하면 고통스러운 증상을 거쳐 2년 뒤 무조건 사망합니다.

평범했던 로렌조의 부모는 아이와 함께 이 병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전문가도 아닌 부모는 의약 서적을 독파하며 아들의 병을 연구합니다.

결국 의사들과 토의할 정도의 의학 전문가가 됩니다.

그러는 사이 생업은 중단되었고 집까지 저당 잡히게 됩니다.

로렌조의 부모는 마침내 몸에 쌓이는 지방을 녹이는 두 종류의 오일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로렌조 오일입니다.

로렌조는 이 오일을 투여해서 병의 진행이 멈춥니다.

발작은 안정되고 눈으로 의사를 표현할 정도까지 회복됩니다.

그러나 로렌조의 어머니는 로렌조보다 먼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뒤 서른 살까지 살았던 로렌조가 죽고 얼마 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납니다.

이 가족의 결말이 쓸쓸하게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게 사랑이구나, 부모의 사랑이 저렇게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는 것이구나.

그걸 느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입니다.

다른 부모가 자기 자식 살리기 위해 숨이 다하도록 희생하는 것만 보아도 진한 여운을 갖게 되죠.

바울사도는 예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나니 그 사랑에 압도되어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바울사도는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었을까요?

성경으로는 우리도 바울사도와 똑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울처럼 그런 주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다 느끼고 싶잖아요?

물론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임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뒤에서 바울이 얘기하지만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계속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열두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주님이 발을 씻어주시는 섬김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울처럼 깊이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계속 주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환난을 견디며 일했을까요?

그 비밀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믿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늘 감화되도록 성령충만을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사람들끼리의 감정 교류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감각으로 온전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깊음을 주님의 십자가로 짐작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 우리에게는 평안, 안전함, 확신 같은 것으로 옵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 내 생활이 별것 없는데도 자꾸 감사가 나온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자꾸 감사를 하다 보면 반대로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막연한 것 같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 주간 피곤했던 몸을 쉬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오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충성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을 그만큼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만큼, 그래서 감사한 만큼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 믿음의 삶의 중심에 항상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나의 사랑이 있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도록 새롭게 바뀐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새 것이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풀어갑니다.

14절하,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에서 놓치기 쉬운 게 있습니다.

주님이 대신 죽으셨으니 너희는 이전처럼 죄 짓고 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죽으심에 연합해서 그 심판받을 내가 죽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 구원에 대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두가 죄에 오염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가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똑같은 죄의 형질로 이어지는 것은 지금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의 본성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잖아요?

성도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연합해서 함께 죽고, 부활과 연합해서 부활하는 것이 영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댓가로 우리를 노예로 쓰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섬기는 천사가 부족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삶을 말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위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나를 위해 사는 것과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

두 가지 중 나에게 더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우리에게 가치있고 복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죠.

억지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억지로 뭘 한다면 얼마나 오래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대속을 믿고 부활을 믿고 새 것이 된 성도들은 저절로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헌신의 정도는 다르지만 성도들의 마음엔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도 섬김이 부족하다 생각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께 헌신하고도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목숨까지도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런 마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계산적인 사람들인데요.

내가 받은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 믿어지기에 그런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알기 전의 나와 똑같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겐 여전히 이땅에 올 때 타고난 겉사람도 있고 거듭난 영인 새사람도 있습니다.

겉 사람도 부정할 수 없는 나입니다.

이 땅에선 겉사람과 속사람의 혼재 속에서 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구원의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겉보기엔 똑같은 계란이지만 생명이 있는 유정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잘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옛것의 어두움이 남아 있습니다.

슬픈 과거, 고난과 아픔, 이전의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내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해석할 때 과거도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의 순간도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허용하신 것이 해석되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부끄러운 죄의 과거지만 그걸 통해 내가 죄인인 걸 알았다고 해석이 되면 그 또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환난이 나를 주님께로 인도하셨다는 게 해석되면 원통했던 마음이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새것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의 고난은 물론 부끄러운 죄까지도 남들 앞에 드러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새 피조물이 되고도 옛것을 더 신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했던 이전 것들을 진리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죠.

고린도교회는 그렇게 과거 우상종교와 혼합된 신앙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런 옛것들은 말씀의 기준으로 재정비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새 피조물이 옛 모습대로 살면 사람과 마귀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3.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화목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두 가지 요지가 담겨 있죠.

1) 하나님과 원수처럼 등졌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2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것은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의미를 완벽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전파자의 말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죠.

고린도교회에 있는 열두가지 문제들 역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증거들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은 너희 믿음이 진실하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종종 기억하며 항상 믿음을 확증해야 합니다.

너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니?

그래서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니?

 

2)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화목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오는 세대에 화목케 하는 복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사실 하나님과 화목해진 성도들은 스스로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이 됩니다.

평생 복음을 전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살게 되죠.

이것은 영광스러운 빚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광고계를 휩쓸었던 광고회사를 가졌던 고정0장로님의 경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이 전성기 때는 억대의 십일조를 드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회사의 주 고객은 삼성, 소니, 파나소닉, 청와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회사 사무실로 생수통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생수통을 보니까 거기에 매직으로 성경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고장로님이 너무 신기해서 이렇게 해도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냐 물었습니다.

배달기사님은 생수통을 발로 차는 사람도 있고, 계약을 깨는 사람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자기 직업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장로님은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자기는 주신 달란트를 나만을 위해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래서 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예수님을 광고하는 비영리단체를 만든 것입니다.

신문, 잡지, 버스, 빌딩 전광판, 지하철역 같은 곳에 말 그대로 예수님을 광고 합니다.

처음 광고는 일간지 하단에 삼천삼백만 원을 주고 낸 예수님 광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낭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간지에 난 그 광고에 일반인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데서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뒤에 뉴욕 타임스퀘어에 광고할 계획을 세웁니다.

가장 유명한 곳에다 예수님을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광고료도 엄청났고 우선은 계약금이 없었습니다.

고장로님에게 유학 중인 아들이 있었는데 한 학기 분의 등록금을 준비해 놓은 게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 것은 건드리기 힘들잖아요?

그 돈으로 계약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들이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고 합니다.

광고료가 삼억이 넘었지만, 다 후원으로 감당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지구상에 가장 핫한 광고의 거리 뉴욕 타임스퀘어에 요한복음316절 광고가 걸리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태국, 호주, 뉴질랜드, 독일, 브라질, 남아공에도 예수님 광고를 합니다.

그리고 요즘 다시 타임스퀘어에 예수님 대형 광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It’ OK with Jesus란 자막과 탤런트 윤유0씨의 웃는 얼굴이 나온 대형 광고가 175일간 나옵니다.

소향, 엄정화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 연예인들이 여기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걸 하겠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항상 갖고, 또 갚아가는 것을 잊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복음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여러 갈등이 터진 것입니다.

목적도, 동기도, 과정도 다 좋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죠.

바울사도는 그러나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내가 생각했던 대로 만족한 결과를 주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으면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당장 좋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 좀 두려워도 괜찮고, 창피해도 괜찮고, 걱정스러워도 괜찮습니다.

그게 이 땅의 인생이고 우리가 벗지 못한 겉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은 긍정적인 것으로만 우리를 기르시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십니다.

바울사도도 그렇게 지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성도들을 위해서는 이 편지로 믿음을 바르게 지도하시는 것이죠.

고난 중에 있던 고린도성도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은 다정한 말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아 주는 게 스스로 시련을 이겨내게 합니다.

세 가지로 권면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길 힘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새 것임을 인정하고 조금씩 더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내게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을 광고하는 고장로님처럼 거창하게 전도하며 살지는 못하겠죠.

그러나 생수통 배달직원처럼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복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잘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짐승의 표 666 (요한계시록13장15절-18절) 남수연 2025.07.29 0 25
다음글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 사람은 새롭게 (고린도후서4장16절-5장10절) 남수연 2025.07.17 0 34

Copyright © 주는나의산성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5
  • Total89,893
  • rss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