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 하나님말씀 >
  • 주일예배설교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 사람은 새롭게 (고린도후서4장16절-5장10절)
남수연 2025-07-17 추천 0 댓글 0 조회 33

지난 주도 더위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장년이 지난 성도님들은 이런 날씨엔 가만히 있기만 해도 기력이 빠지죠.

나이 들면 몸이 점점 닳고 모든 기관들이 약해집니다.

건강에 좋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지만 한계가 있죠.

제 나이만 되도 늘어나는 것은 식탁 위에 약봉지더군요.

이가 아주 건강했던 백목사님도 이번에 임플란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한 말씀이 바짝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사도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때 나이가 50대 후반이니 그 당시로는 노인의 시기로 접어들긴 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특히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본래 다신교를 믿었던 고린도교인들은 믿음의 보상은 현세의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현세의 복이죠.

그런데 믿음의 지도자 바울사도의 삶은 고난 그 자체입니다.

바울사도가 계속 박해를 받으며 노쇠해 가는 걸 성도들이 우려했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보며 자기들의 믿음의 종국에 대해서도 불안한 것이죠.

거기에 대한 바울사도의 답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을 향한 확신이자, 장차 고난 속에서 살아갈 성도들에게 주는 답입니다.

삶에 고난이 와도 믿음은 지켜야 하잖아요?

오늘 말씀이 환난에 대한 우리의 염려를 거두게 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당하는 환난으로 낡아지는 것에 대해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바울사도는 이 4장에서 세 번이나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낙심할 일들이 많았다는 것이겠죠.

우리도 낙심한 내 마음을 다 드러내고 살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낙담한 모습은 자식들의 기를 죽이죠.

바울사도가 성도들 앞에서 낙심하지 않는 것도 그런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책임자가 되고 어른이 되면 힘든 마음을 다 드러내고 살 수는 없죠.

사람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낙심한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악인들은 낙심한 사람을 탐욕의 먹잇감으로 노립니다.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입니다.

이 유태인의사는 자신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회고합니다.

당시 나치는 유태인을 수용소에 몰아 넣고 매일 아침 그중에서 골라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이 의사는 나치가 누구를 데려가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질려 세수도 안 할 때, 사금파리 한 조각을 주워서 식판에 얼굴을 비춰보며 매일 면도를 했습니다.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로 번뜩이는 이 의사에게 나치는 죽음을 통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의사는 끝까지 수용소에 남아있다 종전을 맞이합니다.

낙심할 환경 속에서 마음을 지키는 게 그만큼 중요합니다.

삶이 두려워 낙심하든, 죽음이 두려워 낙심하든, 낙심은 작은 충격에도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낙심하지 않기로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바울사도가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더 확실한 이유를 앞에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또 복음을 위한 바울의 환난은 고린도교인들의 구원을 이룰 것이기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낙심은 그럴만한 어려움에서 생기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낙관적인 마음, 긍정적인 마음으로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분명한 믿음의 근거로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도 낙심하는 습관 대신 믿음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

 

2. 본문에서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을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 겉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새로워지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에게 겉사람이 있고 속사람이 있다는 말씀이네요.

그리고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렇다면 겉사람과 속사람이 무언지를 아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아야 하겠죠.

우선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해 잘못된 생각부터 말씀드립니다.

겉사람은 육체, 속사람은 영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겉사람은 세속적인 것, 속사람은 영적인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은 본질과 태생이 완전히 다릅니다.

겉사람은 모든 인간들이 태어나며 입는 자연적 몸을 말합니다.

이 몸으로 살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격이 겉사람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땅의 장막집이라고도 하죠.

겉사람과 대조되는 게 속사람입니다.

속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긴 내 안의 영적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내 안에 거듭난 생명이 있나 없나 고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새생명을 받습니다.

요한일서512절에서 말씀하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성령께서도 그 생명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속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겉사람과 속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여기서 속사람과 겉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죠.

우리가 겉사람과 속사람을 항상 구분해서 인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다중인격자처럼 됩니다.

해리장애라고 하죠.

겉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이고 속사람은 이전에 없던 하나님을 인식하고 따르고자 하는 새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두 인격으로가 아니라 같은 한 인격 안에서 다른 감정이나 갈등 정도로 드러납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모르겠다, 예수님이 인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속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를 생각하면 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인 겉사람은 모두가 공평하게 낡아집니다.

남은 수명도 짧아지고, 땅에서 일구고 누리던 것들도 자연스럽게 점점 쇠락합니다.

믿음의 수고는 우리의 겉사람을 더 빨리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고생하면 빨리 늙잖아요.

그러나 속사람은 겉사람이 파괴될수록 오히려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이죠.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에 낙심하기보다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에 더 의미를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은 어떻게 날로 새로워질 수있다는 것일까요?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어요?

솔로몬은 그걸 간파하고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잖아요?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가능합니다.

사람은 진부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새로우십니다.

우리가 기도 중이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될 때, 진부했던 내가 갑자기 새롭게 된 것을 느끼게 되죠.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겉사람이 상할 때 속사람은 더 새로워지는 것이죠.

새로워지면 당연히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한 바 있습니다.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속사람이 새롭고 강건해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되길 우리가 늘 원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나의 속사람이 더 강건하길 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킬 때 속사람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낡아지는 겉사람도 속사람을 따라갑니다.

예수님 믿고 나쁜 습관 고쳐지는 게 그래서입니다.

저는 요즘 양동0이란 배우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양동0씨가 찬양하는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이 찬양을 꼭 올려드리고 싶다며 정말 온 맘을 다해서 찬양을 드리더군요.

찬양제목이 보혈입니다.

이 몸에 무슨 소망있나 이 삶에 무슨 희망있나

아무 것 의지할 것 없네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서러워 울던 나날도 애타게 목말랐던 날도

이제는 모두 잊을 수 있네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주의 보혈 어린양의 보혈

나의 죄 희게 하는 주의 보혈 그것 뿐일세

나 이제 담대하게 하네 예수의 보혈 공로로

이제는 의지할 것 하나 뿐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진심을 다해 드리는 믿음의 고백인 게 느껴졌습니다.

영상 밑에는 전에 양동0씨가 성탄전야에 시내의 인파 속에 나타난 걸 보았다는 댓글이 달렸더군요.

사람들은 양동0씨가 노래를 하려나 보다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노래를 한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고통의 세월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겉사람으로만 태어났다 예수님을 만나 새생명을 얻고, 그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걸 양동0씨에게서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서로의 모습에서 보고 있습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롭고 강해지면 결국 낡아서 소멸 될 겉사람 마저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환난이 가져올 놀라운 축복 때문입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이 말씀대로라면 환난은 우리가 잠시 받는 것입니다.

살면서 짧은 시간만 환난을 받는다는 건 아닙니다.

사람은 평생 고생하며 살죠.

젊어서 고생한 대신 나이가 들면 편안히 살아집니까?

안 그렇잖아요?

나이가 들면 그 나이에 맞는 환난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영원이라는 말과 대조할 때 잠시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받는 환난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환난이 과연 가볍습니까?

그런 것은 환난이라고 부르질 않죠.

빚 때문에 모멸감을 느끼고, 밤새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여 보셨잖아요.

답답한 상황이 목을 조여오는 환난이 어찌 가볍겠습니까?

그러나 환난을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의 무게와 나란히 양팔저울에 놓는다면 어떨까요?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이야말로 놀라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다시 17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 인생에서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환난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그 시기를 지나왔다면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환난은 지금의 내 믿음을 이루었노라고.

우리 겉사람은 다루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바울사도도 제대로 못 다루었다고 로마서724절에서 이렇게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환난이 겉사람이 옛날의 일을 행하지 못하도록 고삐를 쥐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살면 더 힘들어질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것이죠.

환난을 지나며 우리는 내게 행복을 줄 것 같던 세상이 가시와 돌짝밭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하늘나라의 영광을 덧입길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하나님이 허용하신 환난입니다.

그렇기에 힘들긴 하지만 환난당하는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정호승시인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의 그늘에 있을 때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고난의 시간들로 우리 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을 항상 떠올려야 합니다.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환난은 잘 보이지만 영광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보고 낙심하기가 더 쉬운 것이죠.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환난은 잠깐이고, 그로 인해 얻는 것들은 영원합니다.

보이는 세상은 좋아 보이고 화려해 보이지만 그것은 잠깐입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과 모든 역사들은 잠깐 후면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뒤 세상이 몇백 년을 더 지탱한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될 거잖아요?

나의 죽음의 순간 내게서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것을 보십시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나의 천국을 항상 주목하며 살아간다면 마침내 그곳의 영광을 실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3) 낙심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우리의 이 땅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완전한 영화를 얻게 됩니다.

영원한 집은 단지 새로운 공간과 주거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늘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던 지금의 겉사람도 완전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과거 천국에 인도되었을 때 그 영원한 집을 보았잖아요?

바울사도에게 천국은 우리처럼 베일 뒤에 가려진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주시며 사랑해 주신 예수님이 계신 걸 봤잖아요?

눈물이나 아픔, 고통 지금 같은 환난, 그런게 없잖아요?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그곳에 가기를 정말 동경했습니다.

다만 사는 게 주님의 뜻이라면 사는 동안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왜냐하면 그곳을 허락하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다 가서 보고 왔다면 이렇게 미지근하게 믿지는 않았을텐데요.

이 편지를 받아볼 모든 성도들도 자기처럼 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댑니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것은 성도들도 예수님의 심판대에서 영생과 영벌의 심판을 다시 받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영생하는 속사람이 있잖아요?

이건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판대에서 우리는 이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행한 것에 대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짧은 이땅에서의 삶을 예수님과 영원한 나라에 잘 조준해서 살아가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나를 찾아주지 않으셨다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을 모르고 내 소견대로 살다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다만 주님을 만났을 때 너무 부끄럽지는 않게 살다 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즘 언론에서 기상이변, 지구위기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그런 환난을 함께 당합니다.

얼마 전 미국 텍사스주를 강타한 폭우로 290명의 사망, 실종자가 나왔습니다.

사망자 중엔 어린이가 27명 있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수한 기독교단체가 주관한 여름캠프 중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3대째 독실한 믿음으로 이 단체를 이끌어 온 캠프 주최자는 아이들을 구하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조카를 잃은 한 삼촌은 조카가 전날 캠프에서 찍어 보낸 행복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추모했습니다.

"조카가 친구들과 함께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낸 것에 감사한다

그날 너무 일찍 땅의 장막집을 벗은 믿음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장막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낡아지고 무너지는 겉사람만으로 세상을 삽니다.

이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영벌을 당할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화로운 몸을 입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속사람을 따라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주님을 위해 좀 힘든 일을 감당할 때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 집니다.

평소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훈련으로는 우리가 매일하는 큐티가 너무 좋습니다.

묵상한 뒤 시간을 내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중에서 무엇을 실천하며 살 것인지를 골라서 실천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속사람이 강해지면 겉사람을 보다 잘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겉사람을 위한 훈련도 해야 합니다.

건전한 지식을 쌓고 건강을 위한 꾸준한 운동도 해야겠죠.

주님을 위해서 받는 환난으로 낡아지는 것은 영광이지만 관리를 잘못해서 겉사람을 너무 빨리 무너뜨리지는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강권하시는 사랑 (고린도후서5장11절-21절) 남수연 2025.07.22 0 41
다음글 서머나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요한계시록2장8절-11절) 남수연 2025.07.09 0 38

Copyright © 주는나의산성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3
  • Total89,874
  • rss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