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 하나님말씀 >
  • 주일예배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고린도전서2장)
남수연 2025-06-25 추천 0 댓글 0 조회 42

고린도교회는 성경시대 교회 중 가장 미성숙하고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열두 가지입니다.

물질주의, 차별, 음란, 파당, 은사 문제, 교만, 우상문화, 성도간의 소송, 구제헌금 회피, 부활에 대한 불신 등등.

우리는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요?

고린도교인들 참 심하다 생각할 것만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는 우리에게 보내신 주님의 편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만 들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고 했죠.

바울의 고린도교회 방문, 그리고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편지를 받고도 변화가 없는 교회를 바울이 직접 방문하죠.

이때 교인들에게 냉대를 받고 일부 교인들로부터 상당한 모욕을 당합니다.

그동안 고린도교회를 위한 바울의 헌신을 생각할 때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몇몇 성도만 모아놓고 떠난 교회였지만 바울과 평생 동역하는 교회가 되었죠.

그에 비해 고린도교회는 천막 제조로 생활비를 벌며 일 년 육 개월을 양육했던 교회입니다.

인생에서 이런 배은망덕은 놀랄 일은 아니죠.

모든 일이 내가 공들인 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방문을 일명 가슴 아픈 방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가슴 아픈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다 피할 수 없지만 평소에 단련된 믿음은 이런 시련을 잘 견디게 합니다.

또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바울사도는 이 가슴 아픈 방문을 서둘러 마치고 조만간 다시 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방문 대신 일명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낸 것이죠.

눈물의 편지는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이 편지를 받고 바울사도의 진심을 깨닫고 성도들이 회개하죠.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을 징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사도가 다시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지난 주 1장에서 고난 당하는 고린도교회를 위로하는 말로 시작했었죠.

오늘은 눈물의 편지에 대한 해명과 용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1. 눈물의 편지를 받고 교회가 징계한 교인들에 대한 용서의 권면입니다.

본문 앞에는 바울이 가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를 해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약속을 번복한 것에 대해서도 교인들 중에 바울을 험담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죠.

가지 않은 이유는 교인들 스스로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고 합니다.

또 바울이 직접 방문하는 게 다시 성도들에게 근심이 될 걸 우려해 편지를 썼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본문 4절입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 편지에 썼던 대로 교회가 문제의 성도를 징계한 것을 잘했다고 합니다.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교인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다 알고 있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근친상간의 죄를 지은 사람으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그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사람을 두둔하던 교인들도 있던 것을 바울사도가 호되게 책망했었죠.

그들이 고린도전서 편지 내용에 불만을 갖고 바울이 오자 항의했을 수 있겠죠.

그 사람들이 어떤 징계를 받았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교단마다 교회법이 있습니다.

교회에 위해를 끼친 사람은 성찬 금지, 예배 참석 금지, 아주 심한 경우는 출교 시킬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런 식으로 징계를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사자는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바울이 다시 이렇게 요구합니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형벌이 충분하니 반대로 너희가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 아닙니다.

징계의 목적이 정죄와 심판에 있는 게 아니라 회개와 구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도 바울사도 개인으로서는 쉽게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체면 깎이고 망신당하는 거 얼마나 싫어합니까?

사도로서의 체면도 깎이고 방조한 성도들에겐 배신감도 느꼈을텐데요.

바울사도가 어떻게 모두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의 용서하라는 단어에 답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언어인 헬라어엔 용서라는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사용한 용서라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카리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리스는 은혜라는 뜻이죠.

잘못한 성도를 용서해야 하는 근거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대속의 은혜를 알기 전 바울 같았다면 어땠을까요?

죄 지은 성도를 율법대로 단칼에 징계하고 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바울은 스스로 의인이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쳤고 본인도 하나도 빼지 않고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나니 똑같은 바울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죠.

이제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디모데전서115절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시제로 볼 때,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가 아니라 현재도 죄인 중의 괴수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바울인데, 의인이었다가 어떻게 갑자기 죄인 괴수가 됩니까?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엔 율법적, 도덕적으로 완벽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니 모든 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신앙은 율법과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신앙도 하나님에 대한 것과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나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전에도 좀 죄인이었고, 지금은 죄인 괴수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면 전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죄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옛날보다 죄를 더 짓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내 모든 인격의 뿌리가 악으로 오염된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과거엔 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포장된 악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복된 것은 어둠 속에 있던 그런 악들이 점점 더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대속이 비로서 이해되고 믿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 죄인 중의 우두머리가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구에게 성도의 자격이 없다고 교회서 쫒아 내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분열시키고 악한 영향을 주는 행위들을 다 덮으라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가슴 아픈 방문도 없었고, 눈물의 편지도 없었겠죠.

성도들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악이 자라날 때는 엄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한 뒤엔 내가 되었든, 남이 되었든, 죄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 같은 죄인들인데 저 사람이 지은 죄를 나는 절대 안 지을 것 같습니까?

죄인들끼리 불쌍히 여겨야죠.

파라솔처0라는 사역을 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개척교회를 하며 생계를 위해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나홀로 아파트라 분리수거부터 청소와 장부 정리까지 혼자서 다 합니다.

어느날은 정말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수요일, 교회에 가야 하는 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 정말 교회 가기 싫다

목사 입으로 그 말을 하고 흠칫 놀랐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관리소장을 하다보니 주민들의 깊숙한 사정까지 다 알게 되더랍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그정도로 힘들게 사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 한 집도 아무 일 없이 행복한 집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그렇게 살다 주일에 웃는 얼굴로 교회 나오시는구나.

성도들의 예배가 얼마나 귀한 헌신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압니다.

이 목사님이 하는 독특한 사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남 야탑역 근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고민 상담을 해줍니다.

파라솔을 설치하고 고민을 들어드립니다라는 작은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처음엔 누가 찾아올까, 반신반의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날부터 대박이 납니다.

사람들이 다 파라솔로 들어와 고민을 털어놓는데,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의논 상대가 없으면 생면부지 목사에게 고민을 털어 놓겠다고 줄을 섭니까?

두어 시간씩 사연을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날은 초등학교 5학년생이 파라솔 주변을 맴도는 게 보였습니다.

아이에게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 갔다, 학원 갔다, 집에 와서 숙제하고 12시에 자는 아주 온순하고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고 싶어서 학교 옥상에 다섯 번이나 올라갔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생이요.

몇 번을 와서 상담을 하더니 그 다음엔 그런 친구들을 데리고 오더랍니다.

어제도 부산의 한 아파트 화단에 10대 여학생 세명이 숨진 채 발견되었죠.

우리나라가 잘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죠.

파라솔처치를 하다보니 사람들이 다 멀쩡하게 보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 속 무거운 돌덩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얹고 사는 게 보이는 것이죠.

바울사도의 눈에 패륜을 저지른 성도에게서도 그 죄짐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징계받은 그 성도는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교회를 떠났겠죠.

부끄러움을 당하고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붙어 있는 성도라면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에게도 이대로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잘못한 줄도 모르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합니까?

예수님도 두 가지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회개하면 용서하라시는 것이죠.

이 말씀은 우리가 매일 죄짓고 회개해도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고 살잖아요?

한편 마가복음11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상대가 어떻든 너 혼자 용서하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잘못하고 다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치고 용서 구하는 사람 별로 못 봤습니다.

전에 유퀴즈에 탤런트 박서0씨가 나왔습니다.

군복무를 청주교도소에서 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도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강력 사건들이 많답니다.

0씨가 또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제도 기사를 보니 접근금지 풀리자마자 아내를 찾아가 살해한 남자가 나는 미안한 거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사람들이 언제 내게 사과하고 용서 빌길 기다리겠습니까?

네가 그냥 용서해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한 뒤에도 계속 자신을 자책하는 감정으로 사는 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엔 점점 괜한 불만이 쌓이고 사람이 댑서 뚱해집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늘 넘어지는 것에 넘어집니다.

그런 나를 자꾸 정죄하고 미워만 하면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고 힘써 고쳐가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죄책감만 가지면 오히려 믿음을 멀리하려는 부작용만 생깁니다.

회개하는 것과 그 문제를 이기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지 노력으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에 더 주력할수록 이기는 힘도 강해진다는 걸 잊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또 용서가 필요한 것은 마귀의 계책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여기서 계책이라는 말은 지적인 재능을 뜻합니다.

사탄이 지성을 이용해 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의 문제들 속에는 계획적인 사탄의 개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무너뜨리려는 것이죠.

이것은 교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사탄의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틈을 내서 가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고 마귀는 찢어발깁니다.

가족들이나 성도들 간이나 사회생활 중에나 사이가 벌어지는 곳에는 악령의 역사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보통은 좋은 사이든 나쁜 사이든 사람들이 긴장감을 갖고 관계를 유지합니다.

악령은 싫은 감정, 섭섭한 감정, 무시하는 감정, 분한 감정을 갈고리로 끌어내서 불화를 만듭니다.

결국 마귀의 갈고리에 내 감정 하나가 걸리면 갈등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상황이 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미 마귀가 개입되었기에 문제는 점점 심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사도가 염려하여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인간의 약점이 만들어 놓은 깊은 골은 옳고 그름의 시비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갈라서고 나면 남은 교인들에게도 상처가 생깁니다.

또 다른 뒷말이 나오고, 분열과 갈등이 이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면 마귀의 계책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이 문제는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열되는 일에 앞장서지 말고 화해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일이든 사람이든 어떤 문제든 분리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실패감에 빠져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 살면서 실패감이 있고 실패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죠.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어떤 내용인지 지난 주에 대략 말씀드렸죠.

눈물의 편지를 들고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디도와 바울사도는 드로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니다.

그런데 디도가 오지 않자 바울사도의 마음이 다급해집니다.

결국 전도의 문이 열린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까지 만나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바울사도 답지 않은 행동 아닌가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드로아로 갔고, 주님이 복음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마음에 짐 때문에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을 위해 더 좋은 일이 무언지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해야 하는데도 멍때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종일 일에 치였던 하루를 마치면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기도 합니다.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걸 알지만 나를 더 희생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불편하게 삽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실패하고 넘어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자기의 실패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앞 뒤가 좀 안 맞는 말 아닌가요?

분명히 실패해 놓고 이기게 하신다니요.

여기서 이기게 하신다고 번역한 단어는 개선 행진이라는 말입니다.

로마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하는 개선행진이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대로 번역하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개선행진으로 인도하시고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죄로 인한 사망과 사탄의 참소를 십자가로 이기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지금도 악을 이기고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 개선의 행진에 우리를 끼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개선행진 속에는 부상을 당해 부축을 받은 사람도 있고,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전우를 잃고 비탄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잘 싸우고 제 몫을 다 하는 성도들만 개선행진에 끼워주시는 게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먼저 자기의 실패의 경험담을 기록한 이유입니다.

바울의 경험상 고린도교회에서 당한 아픔과 실패도 주님의 개선 행진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고린도교회 역시 미숙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의 개선행진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연약한 자들도 주님을 따르다 마지막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은 우리에게서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를 맡게 됩니다.

15,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 향기를 따라오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거절하는 사람에겐 죽음의 향기가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 누군가의 생명과 사망이 달려있다는 말씀을 엄중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린도교회와 바울 같은 여러 가지 고난을 견디면서도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그 본질이 단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만 죽어라고 섬기는 사람의 종이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 사도와 고린도교인들처럼 우리들도 끊임없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죄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어찌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내게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용서할 수 있는힘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바울이라는 한 성도가 예수님과 다른 성도들을 위해 견딘 고난을 생각하면 참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반면 나는 참 쓸모없게 산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의 개선행진 속에 우리도 이미 끼워 주셨습니다.

주님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실제 삶에서도 점점 이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향기입니다.

바울이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며 증거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천년 뒤의 우리에게 생명의 향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계속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인생의 짐과 죄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향기를 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환난 중에 드린 헌신 (역대상22장11절-19절) 남수연 2025.06.25 0 44
다음글 용사들이 돌아온다 (역대상12장) 남수연 2025.06.17 0 55

Copyright © 주는나의산성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5
  • Total89,898
  • rss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