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좀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둘 다 이스라엘왕들의 이야기죠.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동시대에 다스린 양쪽 왕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나옵니다.
그래서 흐름을 유지하며 읽기가 좀 어려운 편입니다.
반면 역대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족보를 소개하고, 정통 다윗왕조인 남유다의 역사만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역대서 기자는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다윗언약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언약은 사무엘상7장에 나오죠.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의 후손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영원히 평화롭게 다스리신다는 약속이죠.
페르시아 지배를 받던 시대의 역대서 저술자는 다윗의 씨가 영원히 다스린다는 언약에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도 늘 다윗이 후손 예수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데 있어야 합니다.
2. 오늘 말씀은 다윗 언약의 주인공이자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의 등극 이야기입니다.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해 왕조가 끝나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동 다윗이 2대 왕으로 선택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등극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민족들 가운데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사울왕의 사위도 되죠.
그 정도면 사울왕이 죽은 뒤 하나님이 내게 왕권을 주시려니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죽여 자기 왕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광기를 부리죠.
다윗은 사울을 피해 10여 년을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다윗은 원치 않게 왕으로 선택되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돌아온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죽음의 추격전이었던 것이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인생의 혹독한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 어리둥절합니다.
믿는 우리에게 복이 아니라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말은 괜찮다고 해도 속은 그렇지 못하죠.
김병년 목사님은 개척했던 해에 셋째 아이를 낳은 아내가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됩니다.
삼 남매를 키우며 아내의 병수발을 한 지가 20년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한밤중 아내의 기저귀를 갈다 이성을 잃고 기저귀를 아내에 배에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 너무 한 거 아냐?
하나님께도 대들었습니다.
하나님, 저 좀 그만 때려요.
다윗도 그런 마음 들지 않았을까요?
제가 왕 시켜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마음만 편히 살게 해 주세요.
살다 보면 성도들이 다 그럴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두렵던 사울왕은 죽고 본 장에서 마침내 다윗은 왕위에 오릅니다.
물론 그 사이 십칠 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우리에게만 천천히 흐르는 게 아니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다윗의 인생을 통째로 보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통째로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3. 오늘 본문은 다윗의 등극 이야기 사이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스스로 다윗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왕조가 바뀌는 데 무혈입성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윗이 자기 왕권을 위해서는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게 놀랍죠.
그렇기에 다윗은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왔다고 하죠.
요새는 다윗이 사울왕의 추적을 피해 도망간 광야의 은신처를 말합니다.
그곳으로 용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람을 붙여주셨죠.
그런데 처음에 보내주신 사람들은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22장2절에 나오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람을 붙여주긴 하셨는데 그게 온갖 오합지졸들이었다는 것이죠.
이들과 광야의 십 년을 보내던 중 드디어 용사다운 용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의 시련 속에서도 분명히 일하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보면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 창피할 정도로 미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대단치 않아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로마서7장24절에서 말씀하죠.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우리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멀리 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믿음이 늘 부족하지만 주님을 놓칠까 봐 크게 한눈팔지도 못하고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자리입니다.
주님을 믿고 성실히 따라가면 후회하지 않을 목적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발명가 에디슨이 한 말도 마음에 새겨둘 만합니다.
‘많은 인생의 실패자들은 그들이 포기할 때, 자신이 성공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원통하고 빚진 자, 가난한 자들이 몰려올 때 다윗은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이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무거운 짐까지 짊어졌습니다.
우리가 지기에 힘겨운 짐만이 우리를 강하게 단련합니다.
다윗은 힘든 짐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지도자로 준비된 것이죠.
우리도 힘든 짐 때문에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광야 길도 혼자가 아닙니다.
좀 부족하고 짐이 되는 사람들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진짜 용사들을 보내주십니다.
약하고 손만 가던 자식도, 마음을 힘들게 하던 가족들도 어느새 용사같이 든든하게 성장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오늘 용사들이 몰려올 때 다윗이 얼마나 뿌듯하고 희망이 생기겠습니까?
‘이제 때가 되었구나,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겠구나.’
그런데 17절을 보면 다윗이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고 합니다.
요새 안으로 들이지 못하고 나가서 맞았다는 것이죠.
다윗이 이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 속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이 드러납니다.
17절,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넘기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너희를 책망하기를 원하노라
인생의 광야에서 다윗이 수없이 겪은 것은 배신과 실망이었습니다.
같은 유다지파인 그일라 거민들을 도와주고도 배신당하죠.
다윗의 시로 추정되는 시편116편에서 오죽하면 이런 말을 썼겠습니까?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부질없다는 것을 다윗이 알게 된 것이죠.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건, 자신을 추앙하건, 다윗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전에 음식점 하는 권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주방장 아무리 잘 해줘도 월급 십만 원 더 주는 데 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간답니다.
사람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오늘 자기를 찾아온 용사들을 보고 다윗은 경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왜 다윗인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배신의 칼을 감추고 나왔다 할지라도 내 손으로 처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신해서 자신을 사울왕의 손에 넘겨준다면 그 죄를 하나님이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마치 자기 결정권이 없는 나약한 자처럼 말합니다.
사실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도 이들이 따라올지 말지 아닌가요?
그러나 내 힘으로 왕좌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주시는 것도, 악인을 떼어내시는 것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새로운 거래처가 생기는 것도, 거래처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인생의 가시밭이 아니라 지뢰밭을 통과한 사람들은 하나님 밖엔 믿을 분이 없다는 걸 철저히 인정하게 되죠.
다윗도 하나님이 자기의 상관이고 결재권자라고 하잖아요?
5. 다윗이 그렇게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께서 삼십 명 용사의 대장인 아마새를 감화하십니다.
사람이 우리 말에 설득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감화하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사울왕이 살아있는 지금, 이들이 다윗에게 온 것은 그들 역시 목숨을 내건 결심입니다.
과연 이 다윗은 우리가 충성을 바칠 사람인가 마음 한구석에 의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 성령께서 아마새를 감화해 결단하게 하십니다.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사울의 장군 아마새가 다윗에게 머리를 숙이고 다윗 수하로 들어온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를 배신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테다,’
이렇게 쎄게 나가지 않아도 아마새 같은 용장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밑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살아온 다윗에게 독선과 독기가 없다는 게 참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광야 같다고 해서 너무 독기를 뿜으며 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잠언에서 우리는 인자하게 사는 것에 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잠언 11장17절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 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언 19장 22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라,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압니다.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시는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사람을 보면 그걸 알게 되는 것이죠.
삶은 궁핍하고 환란 중에 있는 데도 이상하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돕고 계시다는 게 눈에 보입니다.
아직도 내 광야가 너무 길게 느껴져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돕고 계십니다.
루스 우스터만이라는 여류화가가 있습니다.
이 화가의 그림은 독특합니다.
자기의 어린 딸에게 먼저 화폭에 마음껏 낙서를 하게 합니다.
그 다음 그 낙서를 그대로 살려서 멋진 그림을 완성합니다.
그게 우리 인생 같지 않습니까?
수많은 질곡들이 우리 인생의 캔버스에 얼마나 분탕질을 해 놓았습니까?
때론 질병이, 때론 가난이, 때론 뼈아픈 실패가.
그러나 하나님은 달과 별을 지으신 그 손가락으로 우리 인생의 낙서들 위에 다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수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선한 계획으로 날 인도하심을 믿고 지금처럼 성실히 하던 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모든 일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고 내 인생의 멋진 그림을 완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025년6월11일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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