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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린도후서1장1절-11절)
남수연 2025-06-17 추천 0 댓글 0 조회 20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와 바울사도 사이에 있었던 오해와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다 적대 세력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죠.

그보다 고린도교회로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판 남에게 들은 억울한 말보다 친한 사이에 듣는 말에 더 상처를 받잖아요?

나 역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그런 상처와 분노를 주기도 합니다.

그게 바울사도와 우리의 현실이죠.

오늘 바울사도가 고린도교인들과의 가슴 아픈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울사도와 고린도교회와의 관계, 편지의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걸 잘 모르면 고린도후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좀 긴 이야기지만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의 1차전도여행 대상지는 이스라엘과 가까운 소아시아였습니다.

현재 튀르키예 지역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아시아, 소아시아라고 불러서 우리가 이해하는 아시아와 좀 혼동되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가 다 이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입니다.

바울은 2차전도여행도 다시 소아시아를 둘러보려고 계획합니다.

그런데 꿈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고 하죠.

그래서 유럽으로 선교지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2차전도여행은 유럽의 초입인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현재 나라로 마게도냐는 마케도니아, 아가야는 그리스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지역들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이 아가야지방의 수도입니다.

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겐그레아라는 큰 항구가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세계의 물동량이 거의 이곳을 거친다고 보면 되죠.

언덕 위엔 거대한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는 여신숭배의 도시입니다.

무역이 성행하니 돈도 많고 매춘과 쾌락을 쫒는 타락한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온 교회 문제가 다 이런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고린도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을 때 믿는 사람들이 많아 16개월을 머물며 가르칩니다.

고린도에서 평생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만나죠.

바울사도는 이후 소아시아지역으로 떠나는 데 거기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성도들이 바른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은 단지 몇 년으로는 모자랍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드러난 문제를 보면 과연 성도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모자랍니다.

그러나 오늘 1절에서도 바울사도는 이들을 당연히 성도라고 부릅니다.

미숙한 신앙과 불신앙은 다릅니다.

문제는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이 보낸 고린도전서를 받고도 상황을 바로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사도가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죠.

그런데 어이없게도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사도를 환대한 것이 아니라 모욕적인 대접을 합니다.

바울사도는 마음만 상하고 좋은 결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죠.

이후 동역자인 디도 편에 준엄한 훈계와 눈물로 쓴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뒤 바울사도는 디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얼마나 마음이 초조했는지 디도가 오지 않자 마게도냐로 디도를 만나러 갑니다.

당시 전도하던 드로아지역에 전도의 문이 열렸음에도 거길 떠납니다.

사도정도면 교인들에게 큰 존경과 권위로 대접받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사도만 이런 대우를 받은 게 아닙니다.

요한삼서를 보면 요한사도가 보낸 사역자를 교인들이 교회에 들이지도 않고 쫒아낸 일도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어떻습니까?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 성도들이 오자 두려워하여 자리를 떴다고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합니다.

성도들 눈치를 봤다는 것이죠.

세상에서는 실력 있는 사람들이 갑이지만 신앙 안에서는 실력 있는 성도가 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 그대로 되는 게 신기하죠.

마태복음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사역자들 뿐 아니라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들도 성도들에게 상처 될 일이 있을까 얼마나 조심합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과 섞여 사는 성도라면 당연히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서 전도해야 되잖아요?

바울사도 조차도 활짝 열린 전도의 문을 등질 만큼 성도와의 관계에 노심초사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듣게 됩니다.

다행히도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에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바울사도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사도가 기쁨과 감사로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이 정도 스토리를 이해하시면 앞으로 고린도후서를 볼 때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2. 바울사도는 편지의 서두를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무엇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1) 고린도교인들에게 고난이 닥쳤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때의 문제는 고난이 아니었죠.

도덕적인 문제, 계파 갈등, 빈부 차별, 은사를 자랑하다 생긴 다툼, 그런 문제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성도들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한번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편지에서는 서두에서 바로 고난이 나오는 것이죠.

무슨 고난인지는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절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사도가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교회와 성도들이 내밀 수 있는 신분증 같은 것이죠.

고린도교회도 비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게 될 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처음에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세상 짐과 고난을 잔뜩 짊어지고 나오죠.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면 그 짐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위한 짐으로 바뀌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세상 짐이 다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가볍게 지게 되죠.

고린도교회도 점점 그렇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신화를 믿는 민족 중에서 점점 소외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또 디모데후서312절에서 말씀하죠.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세속적인 가치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핍박도 옵니다.

내 본래적인 성품과도 싸워야 합니다.

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들은 여러 가지 덫을 놓고 문제를 유발합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이런 고난은 성도로서 당연히 받는 것입니다.

 

2)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고 합니다.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만나는 모든 고난에 넘치게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상처받은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이사야서40장에 보면 바벨론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을 위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물론 누가 위로를 한다고 해서 내가 겪는 고난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진심으로 내 곁에서 위로해 주면 그게 이겨나갈 힘이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위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만큼 각자의 삶도 버겁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족도 누군가 계속 고난을 당하면 점점 위로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진정한 위로를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합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모든 괴로움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당하는 고통 중에 모르는 게 있으시겠습니까?

다 당해 보셨는데요.

그렇기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당해 본 사람만이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잖아요?

3)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까요?

여기 위로하다는 단어는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곁에 함께 하다, 상담해 주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그렇게 상담하며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죠.

마음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기도해 보셨습니까?

성령께서 친절한 상담자처럼 내 말을 들으시고 문제에 대한 지혜를 주시는 걸 저는 항상 경험합니다.

바울이 여러 날 잠 못 이루며 당장 고린도로 달려가고 싶었겠죠.

가지 말고 눈물의 편지를 쓰도록 성령께서 상담해 주신 것이죠.

직접 보고 훈계했다면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말보다 편지가 더 힘이 있다고 하잖아요?

고린도성도들은 절절한 편지를 받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바울의 진심을 알게 됩니다.

문제가 해결되니 바울사도가 큰 위로를 받은 거죠.

성도들은 사실 하나님이 계시고 내 문제와 내 힘든 상황을 아신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데 어떻게든 도와주시겠죠.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주루룩 흘려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 위로는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 하나님께 상담받고 위로받아야지그렇게 기도로 나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성도를 통해서 위로하십니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다른 누군가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가족이나 이웃들을 참고 섬기는 어려움은 그분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위로인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고난은 감내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협성대학에서 목회상담을 가르치는 이00교수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인교회 교육목사를 할 때입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델라웨어강으로 카누 체험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물에 빠지는 응급상황이 발생합니다.

헬기까지 와서 뉴욕으로 급히 이송했지만 학생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인솔자인 이00목사님이 제정신이었겠습니까?

장례가 진행되는 데도 머리 속은 하얗고 감정은 완전히 셧다운되어 아무 느낌도 없는 패닉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함께 갔던 집사님 한 분이 이교수의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넋을 놓고 있는 이교수 곁에서 장례 절차가 다 끝나도록 따라다니며 꼭 붙어 있었습니다.

끔찍한 사고의 순간 이교수님은 이제 다 끝났다’, 학업도 목회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께 큰 위로를 받으며 다시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한 명만 내 곁에 있어도 버텨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더 노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고난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8절부터 자신이 겪었던 극심한 고난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사도행전14장을 보면 실제로 바울이 거반 죽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부활하셨다고 전하는 데 분노의 돌맹이가 날아 왔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 밖에 내다 버린 바울을 바라보는 동역자들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눈을 뜨고 일어납니다.

걸어서 다시 성으로 들어가 성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살 소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그런 핍박은 너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구하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처음부터 돌에 맞아 죽지 않게 해 주시면 더 좋지 않습니까?

바울처럼 헌신하는 사도를 왜 그렇게 당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마음 속에서 늘 하나님과 갈등하는 것이죠.

하나님, 왜 이런 상황을 미리 막아주지 않으신 건가요?

왜 그러셨는지를 당사자 바울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9,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때로 우리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두시는 이유입니다.

죽음 같은 상황이면 누가 건져줘야 삽니다.

하나님이 살리셔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게 하시려는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죽을 일을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또 건져주실 것을 믿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이 더 살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의 소망은 큰 사망에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만 고생하고 올라오라고 하시면, 바울은 가장 바라는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도 살리는 게 유익이면 살리시고, 죽는 게 더 복되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도들의 고난에서 성도의 고난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잘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이 죽을 고비를 일부러 당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기존 종교사회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가면 당연히 충돌이 생기죠.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도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복음은 죄인들을 불쾌하게 하고 적대감을 갖게 합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박해와 환난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은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자비하신 창조주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기 의지로 선택하며 살 권리를 주셨잖아요?

다윗이 사울에게 쫒겨 다닌 십 년 동안 하나님은 사울의 마음을 바꿔놓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 대한 미움은 사울의 자기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선택대로 살아가도록 보장하십니다.

악인의 악한 선택도 존중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선하신 뜻을 갖고 감화하신다 해도 결정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결정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합리적이고 질서 있고, 공정하고 도덕적으로 다스리십니다.

현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격을 너무 떨어뜨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도들만 고난을 막아주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응답하신다는 무속적 신앙은 이제 세상에 안 먹힙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생각이 없으신데 우리가 하나님 신용을 깎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 이외에 세상사람들과 다른 특혜를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다만 똑같은 운동장이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룰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룰대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살면 삶은 그냥 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웬만한 갈등은 막을 수 있고 어떤 문제든 말씀에 따라 가면 다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못해내는 무능한 자녀들로 우리를 키우시겠습니까?

물론 바울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 같은 기적의 섭리도 있고 매일 함께 하시는 은혜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다만 성경에서 그런 부분들만 끌어내서 너무 욕심을 키운 게 문제인 것이죠.

이 땅에서의 복에 목적이 있다면 그건 영생이 목적인 우리 신앙이 아닙니다.그렇다면 바울사도가 지금 왜 저러고 살겠습니까?

잘 살려는 욕심으로 스스로 희망고문 하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에 스며들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구원의 선물은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 더 큽니다.

왕궁 무도회 티켓을 받은 게 아니라 왕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이 계십니다.

나중에 맞이할 그 사실을 지금부터 누릴 수 있는데, 하나님은 땅에 것만 목말라 하는 우리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우리 마음에 천국의 소망이 점점 커지면 이 땅의 삶은 당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도 이기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고린도전서의 성도같이 죄의 본성과 세속에 얽혀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고린도후서의 성도같이 예수님을 따르며 고난받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대단한 고난을 감내하겠습니까?

예배하고 봉사하며 경건 생활 감당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마음에 전도대상자 한 명 품고 눈치 보며 살면 주를 위한 고난입니다.

원치 않게 만나는 여러 가지 고난도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지난 주 인도에서 비행기사고로 이백육십구 명이 사망한 것처럼 세상은 우리 힘으로 대처할 수 없는 고난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같은 운동장에서 같은 규칙 아래서 경주합니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같이 맞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같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무조건 성공의 길만 걷는 것은 아닙니다.

괜한 오해와 기대를 하고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는 신비한 은혜를 못 받아서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가진 믿음으로도 훌륭하게 잘 해 낼 수 있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기쁘게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항상 위로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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