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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2장)
남수연 2025-05-01 추천 0 댓글 0 조회 3

아가서는 히브리성경의 제목으로 솔로몬이 지은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아름다운 사랑시입니다.

이런 남녀상열지사, 연애사, 그것도 농밀하기까지 한 사랑이야기가 성경에 담겨 있는 것이 좀 의아하죠.

매일성경 아가서를 보며 어떻게 묵상해야 할지 좀 어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아가서는 남녀의 깊은 사랑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서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절기에 함께 낭송했습니다.

이 찐한 사랑이야기를 해방절에?

그렇다면 아가서를 구약성도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짐작 되시죠?

아가서를 하나님과 하나님백성들의 진실한 사랑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솔로몬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가늠하면 될 것입니다.

아가서 큐티를 시작하기 전에 전체적인 서론을 들었으면 좋았텐데, 다 마치고 오늘 듣게 되었습니다.

아가서를 다 묵상한 다음이니까, 이해하기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가서 전체 스토리는 순서대로 매끄럽게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룻기 같은 경우는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죠.

그런데 아가서는 그렇지 않아서 읽어도 내용이 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히브리성경 원문에는 시 같은 운문체도 있고 설명하는 산문체도 들어있습니다.

등장하는 화자들은 솔로몬, 술람미여인만이 아닙니다.

여러 여자들이 합창하는 것 같은 장면도 나옵니다.

약간 뮤지컬 같은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순서도 시간순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간 중간 둘이 만났을 때를 회상하는 이야기들이 끼어 있어서 성도님들 개인적으로는 전체 문맥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합해서 아가서의 줄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기는 솔로몬왕의 통치 초반기로 생각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6장에 솔로몬의 왕비가 육십 명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알기로 솔로몬은 왕비가 칠백 명에 후궁이 삼백 명이었죠.

그러니까 아직 집권 초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을 소작농이 경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작농이 술람미여인의 어머니와 오빠들입니다.

아가서를 잘 보면 술람미 여인이 신데렐라 같은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오빠들이 술람미에게 포도원 일을 다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양떼까지 돌보게 합니다.

그래서 1장에 보면 술람미가 자기 얼굴이 검고 유목민의 장막같이 거칠고 보잘 것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솔로몬이 잠행을 했는지, 자기 포도원에 갔다가 술람미를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극에 나옴직한 사건이죠.

술람미는 처음에 솔로몬이 왕인 것을 모릅니다.

외지에서 온 낯선 양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친근한 대화가 오가다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죠.

솔로몬은 왕궁과 포도원을 오가며 술람미 여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여인에 대한 사랑을 참지 못하고 다급한 마음으로 달려와 청혼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전체 스토리를 이해하고 본문 말씀을 잠깐 상고해 보겠습니다.

 

8,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술람미 여인도 왕궁으로 돌아간 솔로몬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란 걸 알았으니 다시 돌아온다는 말에 반신반의했겠죠.

그런데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솔로몬을 멀리서 볼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솔로몬왕이 벽 뒤에 서서 창살 틈으로 술람미를 엿보고 있다고 합니다.

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청혼하려는 남자라면 당연히 신부의 마음이 어떨지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솔로몬은 자기 격정에 몰려 청혼하기 전에 술람미여인의 마음을 한번 더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청혼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의 사랑을 끝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왕의 지위로 결혼을 밀어 붙이는다면 사랑에 대한 모독이죠.

술람미 여인의 입장에서도 이 결혼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이 왕의 신부가 되는 거잖아요?

술람미는 검게 그을린 촌스러운 외모도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하얗고 세련된 예루살렘 도시여자들을 보았을 거잖아요?

솔로몬의 사랑이 진심인지, 과연 왕궁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보면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왕 사이에 마음이 엇갈렸던 것을 회고하는 부분이 잠깐 나옵니다.

이런 이유로 위상 높은 왕이 시골 처녀의 허름한 벽 뒤에서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사랑하고 주님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계시록3장에서 말씀하시죠.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과 우리 죄인들의 신분으로 본다면 솔로몬과 술람미여인의 신분 차이는 댈 것도 아니시잖아요?

그런 주님이 우리 마음을 스스로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도록 밖에 서 계십니다.

우리는 술람미여인처럼 겉만 검고, 겉만 유목민의 장막처럼 때에 쩌든 게 아닙니다.

우리는 속이 더 검고 못생겼죠.

그런 우리를 주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시는 지 우리는 이해가 안되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걸 자꾸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여인도 그래서 솔로몬의 사랑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드러나듯, 사랑도 결국은 진실이 드러납니다.

드디어 술람미 여인의 마음을 확인한 솔로몬이 청혼을 합니다.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불확실한 사랑에 대한 의심이 걷혔으니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긴가민가하고 미적거리며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아가서를 보면 솔로몬의 청혼이 참 아름답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정략 결혼으로 얻은 많은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술람미여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아름답게 기술해 남긴 걸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여인을 정말 사랑했던 것이죠.

왜 솔로몬을 감동해 이렇게 그 사랑을 아가서로 남기게 하셨겠습니까?

우리와 예수님의 사랑을 이런 방식으로도 알리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허전함을 느끼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서가 아닐까요?

부모가 살아 계실 땐, 부모님 사랑이 풍족하진 않아도 우리가 느끼는 게 있죠.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이가 얼마나 지극한 부모 사랑을 받습니까?

나이가 들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 편인 부모가 떠나고 더이상 그런 존재가 없게 되죠.

젊을 땐 얼마간이라도 이성 간의 사랑의 열정에서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나이가 들면 서로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원하는 만큼 서로 사랑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도 예수님 말씀대로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어차피 그런 연약함과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솔로몬의 사랑고백처럼 지금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실 거라고도 잘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신이신 하나님의 피조물을 향하신 포괄적인 사랑을 생각합니다.

뭉뚱그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길 작정하실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나를 깊고도 깊게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대신 십자가형을 받겠다 결심할 수 있을까요?

자식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누구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알되, 더구나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임을 알아달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믿고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

그러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믿는다해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배우고 믿음과 의지로 주님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술람미여인이 단지 솔로몬왕의 손에 질질 끌려서 따라갔겠습니까?

아가서를 보면 술람미여인의 사랑 고백도 만만치 않습니다.

앞에 5절에 보면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마음을 받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전부로 주님을 사랑하길 당연히 원하시겠죠.

말씀을 믿고,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귀하지만 한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감정을 쏙 빼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죠.

무덤덤한 감정으로 이것이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기엔 아쉽잖아요?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대해 첫사랑 같은 사랑을 한번쯤은 맛보게 하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늘 교회가 생각나고, 버스를 타면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되고, 입에는 찬양이 맴돌고, 그런 첫사랑이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우리 믿음이 더 안정되고 성장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우리 감정이 결혼 40년차 부부 같은 그런 무덤덤한 마음은 아닌가요?

요즘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천국을 어떻게 그렸는지 궁금해서 짧은 영상 몇 개를 보았습니다.

드라마 속 천국에서는 원하는 나이대로 살게 해 줍니다.

남편 역을 맡은 배우 손석구씨는 아내보다 조금 먼저 죽어 천국에 갑니다.

삼십대 나이를 선택해 잘생긴 손석구씨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천국에 가게 된 아내인 김혜자씨는 팔십대를 선택합니다.

남편이 죽기 전에 당신은 지금이 제일 아름다워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죠.

삼십대 손석구씨와 팔십대 김혜자씨가 다시 부부로 만난 이야기입니다.

참 그림이 안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젊은 남편 손석구씨가 늙은 아내 김혜자씨를 사랑하더군요.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 하는지.

겉은 삼십대지만 팔십대 남편이 팔십대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첫사랑 주실 때와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내 사랑은 주름지고 감각이 없어지고 진액이 다 빠진 그런 사랑은 아닌가?

아가서를 보며 솔로몬의 사랑고백에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되살려 보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술람미여인의 사랑고백을, 쑥스럽지만 자꾸 예수님을 향해 드려보길 권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기 원한다면 분명히 성령께서 지식과 의지뿐 아니라 감정에도 사랑이 충만하도록 감화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삶이 권태롭고, 지치고 모든 게 시들해지고 있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씨름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서 다시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2025년 4월30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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