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성도님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세상 사람들에겐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식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묻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같은 부활은 인류 역사상 일어난 적이 없으니, 혹시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해도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얼마나 이해하며 믿고 있을까요?
우리는 부활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 전개하는 구원의 이치 안에서 부활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대속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의인이 세상에 있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 것은 각자의 죄값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죄가 없다는 증명이고, 그래서 우리 죄를 대신 속죄 하셨다는 게 입증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지 무논리를 믿는 건 아닙니다.
살아가는 다른 일에는 우리가 다 논리적이잖아요?
사람이 논리가 안 맞으면 무시당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신앙은 더 사실과 논리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더 논리적으로 성경을 따지며 읽는 똑똑한 믿음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부활에 대해 이해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장래 나의 부활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서 중점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엄청난 파워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잘 이해할수록 우리 신앙에 파워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면 힘없는 신앙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주님의 부활을 통해 다시 한번 능력있는 부활신앙을 되찾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날을 성경을 통해 재구성하며 본문을 살펴봅니다.
본문의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째 날, 밤입니다.
1) 예수님은 새벽에 부활하셨는데 즉시 제자들에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죠?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 처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만난 사람들도 있는데, 전체 제자들에겐 나타나지 않으셨던 것이죠.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새벽 이후, 온종일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밤이 다 되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전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죽음은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를 치르고 나면 다시 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절대로 갖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랬던 것이죠.
정말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래도 만난 사람이 있다는 데? 아냐, 잘못 보았을거야.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상황이 아닌가요?
우리 믿음이 그렇잖아요?
내 믿음이 맞는 걸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실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 기도를 들으실까,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갈등과 싸우는 시간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건들은 그 자체가 뭔가를 드러내고, 뭔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얼마간 두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문은 들리는 데, 정작 자기들에게 오시지 않는 예수님을 두고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까맣게 잊었던 부활을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부활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살려보려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예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현실과의 싸움보다 믿음과의 싸움이 더 힘든 것입니다.
절망보다 더 힘든 게 작은 믿음의 불씨를 잡고 싸우는 것이잖아요?
차라리 포기하면 지금보다 속 편해질 일들이 많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든 삶의 문제이든 스스로 싸우며 갈등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십니다.
예수님을 위해 큰 헌신과 희생을 한 성도들의 간증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그래프에는 하나님을 심각하게 불신했던 큰 굴곡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파동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확고해지기까지 하나님이 계속 믿음을 우겨넣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선 우리를 감화하시지만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들은 제자들의 의심의 시간처럼, 신자들의 믿음에도 주기적인 의심의 시간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의심하는 자들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고 가는 것은,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2) 그러나 부활의 첫째 날이 다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신앙이나 삶의 문제에서, 믿음과 의지로 견디는 것은 우리의 시간입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간이 차면 하나님의 시간이 옵니다.
그때는 은혜와 위로와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개입하실 정확한 시간을 아십니다.
전에 어떤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분이 군대에 가는 데 군종병으로 가길 오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 같은 확신이 들었는데, 결국 군종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한 일은 시멘트 섞어서 군대 건물 보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한 팔 년 정도 지난 뒤 우간다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 보니 현지 성도들이 지붕도 못 가린 엉성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님이 왜 하나님이 군종병을 시켜달라는 기도에 침묵하셨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배운 건축 보수 실력으로 적은 선교비만으로도 훌륭한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의문도 풀리고 일도 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림과 고민과 갈등으로 지쳐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6절,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 인사했습니다.
우리가 안녕하세요, 평안하신가요.
그렇게 인사하는 것과 비슷하죠.
사람들이 평안을 묻고, 평안을 비는 인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생에 평안이 없기 때문이죠.
사람에게 가장 바라는 게 평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이레네’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전쟁의 위험이나 신체적인 박해가 없는 평안과 내면적 안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두 가지가 만족 된다면 가장 완벽한 평강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평강은 희망사항이지 세상에서 이뤄져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희망사항을 전달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제 진정한 샬롬을 우리가 받게 되었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의 죄값을 다 감당하셨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뤄졌습니다.
이제 믿는 자 속에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평강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이 평강을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남들에게 뭔가를 숨기기도 하고 나 스스로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평강이 있는 것처럼 속이지는 못합니다.
불안은 너무 강력한 본성이라 어떤 의지로도 잠재우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는 평강만이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마음에 평강이 없을까 생각하신다면,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세상과 괴로운 문제들만 바라보는 데 무슨 평강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지만 평강의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면 평안 중에 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님을 다시 보았을 때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었을 것 같죠.
그러나 죽음으로 떠나 보낸 사람을 진짜 다시 만난다면 그게 쉽게 될까요?
오히려 주춤거릴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어정쩡한 반응이 그런 것입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혼령으로 알고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37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게다가 예수님은 문이 그대로 닫힌 상태에서 갑자기 방 한가운데 나타나셨거든요.
육체를 가졌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제자들이 난생 처음 보게 된 부활의 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주님의 몸을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상세하게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제자들이 부활을 완전히 믿게 하려고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르쳐주시 위해서입니다.
빌립보서3장20절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 몸을 주님의 영광의 몸처럼 변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전에 어떤 프로에서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모습을 AI로 복원해서 가상현실 세계인 VR로 만나게 해 줬습니다.
암투병으로 떠난 엄마를 다시 만난 딸은 애틋한 손으로 엄마를 만지려 합니다.
그러나 가상 이미지를 쓰다듬는 손이 오히려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울면서 ‘엄마, 나 한번만 안아주면 안돼요?’ 그러더군요.
정말 사랑했던 사람을 얼마나 만져 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었겠습니까?
만일 천국에 가서 만난 가족이 그렇게 홀로그램 같은 영으로 존재한다면 그런 천국은 만족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하셨죠.
육체가 아니면 어떻게 사람을 안겠습니까?
육체가 있어야 훨씬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죠.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격하게 포옹할 것을 기대합니다.
제자들이 그래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자 주님은 거기 있던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십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한 우리의 천국 생활을 알 수 있습니다.
1) 이 땅에서의 관계성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들을 보면 천국에서 이생의 우리 기억이 다 삭제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보면 사람들이 다 이생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함께 먹자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혈육들과 믿음의 가족들을 만나기에 더 기쁜 게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싸움을 함께 감당한 공동체가 천국에선 서로 모르는 관계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내 가족이 하나도 없고, 교우도 없고, 친구도 없이 혼자라면 얼마나 후회스러울까요.
2) 부활한 우리들의 몸의 상태는 예수님처럼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한 경험을 굉장히 특별하게 기록합니다.
10장41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예수님은 오늘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단 한번 드신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 외에도 제자들과 여러 번 즐겁게 식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거기 보면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예수님이 생선을 드셨다는 것이죠.
천국은 먹는 즐거움도 없는 곳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갈비일지, 잡채일지, 김치찌개일지는 몰라도 천국은 우리가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다 있는 곳입니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면 당연히 있겠죠.
다만 지금 세상에서처럼 반드시 먹고 마셔야 사는 몸은 아닙니다.
저는 천국이 우리에게 너무 낯선 외계 행성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 걸 보면 하나님의 심미적 취향을 가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육체를 가진 상태로 부활시키셨다면 천국 환경은 육체로 살기에 좋은 곳일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최종으로 임하실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1장6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단순히 평화로운 하나님나라를 상징적으로만 하신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천국은 지구 환경 이상으로 아름답고 평화롭고 목가적일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기대와 상상 그 이상일 것은 분명합니다.
3) 그리고 우리의 몸은 주님처럼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완벽하고 신비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당연히 늙고 병드는 지금의 몸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바뀌어야 겠죠.
4)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죄의 본성이 완전히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의 본성이 그대로 있다면 거기가 아무리 천국이라도 지금과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고통 중 서로의 죄성으로 인한 게 제일 많잖아요?
국가도 사회도 결국 인간의 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더 고통당합니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개성은 살아 있지만 죄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처럼 서로에게 상처 주며 고통받을 일도 없는 것이죠.
가난도 질병도 근심도 눈물도 없는 곳에서 나로 살되, 정말 아름답게 변화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부활하셔서, 우리가 장차 그렇게 살 것을 앞장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도 영원과 행복을 향한 스토리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창시자나 종교의 헌신자도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는 걸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뤄지고 실제로 보여주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구원의 비밀이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이땅에서 아담처럼 살게 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주님과 같이 만드셔서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빅픽쳐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기만 하면 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오늘 감사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을 통해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부활에 대해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이 평소 가르치신 것을 되풀이 하셨다는 것이죠.
45절,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끝이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모습을 한번만 보여주시면 다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평소 가르치셨던 성경의 내용들을 다시 가르치고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은 감정과 의지만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죠?
어떻게 믿을 건데요?
성경을 배우며 성경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할지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가르치시는 지 배웠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지를 성경이 아니면 어디서 알겠습니까?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에 대한 예언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 집니다.
또 신약성경에서 구약의 예언들을 모두 성취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부활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월급 좀 오르는 게 가장 큰 기쁨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든 먹고 살잖아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그렇게 삽니다.
이 세상을 마칠 때, 그때가 제일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내세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잖아요?
사실 진짜 인생은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에서 누리게 될 진짜 행복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우리의 부활을 믿으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은 무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신앙의 절망 속에서 앞으로 내 미래는? 다시 어부로? 그동안 예수님께 배운 것은 다 어디에 쓰나?
성도들은 믿음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복음을 위한 위대한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의 부활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확신과 기쁨으로 담대히 살아갈 힘을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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