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이사야서에 담긴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종’을 보내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을 네 편의 노래로 예언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중 우리는 네 번째 노래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52장에서 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실지를 공개하십니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뜻을 형통하게 성취하고 지극히 높임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놀랄 만큼 타인보다 상하게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넘어 모든 민족의 구원자가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53장은 ‘여호와의 종’ 메시야가 당하게 될 십자가 대속의 장면을 뽑아 마치 실황처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유퀴즈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자에게 퀴즈를 내고 백만 원 상금을 주죠.
출연자가 못 맞추면 힌트를 주고 싶어서 유재석씨가 입이 들썩들썩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메시야로 보내실 예수님을 우리가 못 알아볼까 봐, 힌트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정답을 다 가르쳐 주시는 것 아닌가요?
‘이래도 안 믿을래?’
그런데도 이사야선지자는 사람들의 반응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오늘 본문 4절부터는 메시야가 당하는 육체적인 고난을 선지자의 카메라에 담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죠.
한 절씩 살펴보며 예수님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 그로 인해 우리가 어떤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1)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인생의 질고는 질병과 우환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어느 누구도 질병이나 질환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노년이 되면 더 많은 질고를 지게 되죠.
노년엔 숨 쉬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힘이 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질고의 원인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병에 걸리는 것은 옛죄로 인해 선고받은 징계가 계속되는 것이지, 현재의 죄에 대한 저주와 심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못 박히신 채 여섯 시간 극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서 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한 구약성경이 또 있습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22편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난을 당한 적이 없는데, 성령의 감화를 받고 자기 후손인 메시야의 고난을 마치 자기가 당하는 것 같이 기록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극심한 아픔을 겪으셨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내 몸속에 어느 장기가 있는지, 어디에 뼈가 있는지 건강한 때는 전혀 모릅니다.
생각 자체가 안 납니다.
위가 아파야 내 속에 위가 있다는 게 생각나죠.
몸에 뼈가 206개라고 합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206곳이 다 아프셨다는 것입니다.
206개의 뼈 중에 1/4에 달하는 54개의 뼈가 양 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손에 못이 박히셨으니 54개의 뼈를 깍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암으로 겪는 통증도 무섭고, 복합통증증후군 고통도 끔찍합니다.
전염병으로 몸이 썩어가는 것도 무섭고, 사지가 절단되는 아픔도 소름이 끼칩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신체의 부위 중에 고통을 안 당하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토록 책임져야 할 그 고통의 질고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셨습니다.
사람의 깊은 곳엔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슬픈 존재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을 보면 다 안쓰럽고 슬퍼 보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더 안쓰럽죠.
잠언 14장 13절에서 말씀하셨죠.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전도서2장2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렸던 솔로몬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건 세상의 어떤 것도 인간 내면의 슬픔을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죠.
성공 뒤에도, 쾌락 뒤에도, 끄트머리엔 기묘한 공허와 슬픔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 근원적인 슬픔은 집을 잃어버린 나그네와 고아의 슬픔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땅거미 지는 시간에 사람들 마음엔 애수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매년 11월 첫째 월요일이 ‘세계 고아의 날’입니다.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모르셨을 것입니다.
‘고아의 날’ 왠지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동들이 처한 가난, 학대, 질병, 외로움, 그 삶이 우리는 상상도 안되죠.
하나님이 왜 자신을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창조주를 떠나 보호자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고아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 한 여가수가 라이브 방송을 켜 놓고 처지를 비관하며 펑펑 울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먹고 쉬기는커녕, 세수할 시간도 없다, 부양할 가족이 너무 많아 그래도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팬들에게 푸념했다는 거예요.
방송이 논란이 되고 얼마 뒤 다행히 번아웃을 좀 이기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돈으로 행복은 살 수 있는 것 같다.’
금융치료를 받았나 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하지만 슬프지 않을 권리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은 곳의 슬픔은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의 슬픔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슬프지 않을 권리를 찾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셨을 슬픔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이에 육신의 아버지를 여의는 죽음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일찍 가장이 되어 가난한 가정과 식구들을 책임지셔야 했죠.
사랑하는 가족들을 풍족하게 해 주지 못하는 슬픔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슬프셨지만, 배신하고 괴로워할 제자들 때문에 더 슬프셨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처절한 고통과 죽음을 지켜봐야 할 어머니의 슬픔 때문에 슬프셨습니다.
그런 게 사랑이잖아요?
죄가 일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죄의 결과인 슬픔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신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예전의 그 슬픔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나에 대한 연민과 슬픔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고난과 우환 자체가 슬픈 게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 내 안에 있는 슬픔이 하염없이 꼬리를 물고 나를 슬프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고난이면 그냥 고난이고, 슬픈 일이면 단지 그것 자체만 슬퍼합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찾았고, 돌아갈 집이 있잖아요?
더 이상 고아와 나그네의 설움은 없게 된 것입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1) 예수님이 내 죄와 허물 때문에 찔리셨습니다.
여기서 찔렸다는 단어는 구멍이 뚫렸다는 단어입니다.
이사야선지자의 정확한 예언에 말문이 막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완전히 구멍이 뚫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와 허물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여기서 상했다는 단어는 짓 밟히고 짓이겨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내 죄악에 대한 심판을 대신 당하시고 몸이 짓이겨 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평안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가려진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겨누고 계시는데, 평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느끼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는 우리 죄를 덮어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겨누던 하나님의 진노는 떠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죠.
하나님과의 화평은 나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내 환경과도, 그리고 나 자신과도 불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고 용납이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면 주님 자신이 화평이시라는 걸 점점 알아가게 되죠.
에베소서2장14절에서 바울사도도 말씀했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2)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기에 우리는 질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고귀하신 예수님이 범죄자나 노예가 맞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죽음과 질병은 명백히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질을 당하게 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 사망과 질병의 저주를 풀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사망에 매여 죽음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질병이 왔을 때 더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이미 벗어나 영생을 얻었기에 질병을 죽음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은 병일 뿐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고쳐주실 것을 믿는 용기로 병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이 현재의 질병으로 부터의 치유는 아니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약만 먹는 사람들과 약을 먹으며 기도하는 신자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성경은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어떤 질병이든 기도하며 치료할 때 하나님은 무슨 일인가를 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치유 받으며 살지 않았다면 지금 더 심하고 더 많은 질환으로 고통당하며 살 것입니다.
전에 탈북해서 미국으로 가 선교활동을 하는 연광0목사라는 분이 기독교 방송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간증에서 진짜 특별해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분이 학창시절 패싸움을 하다 삽에 맞아서 머리 앞부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그 상처는 아물었지만 머리카락은 나지 않았습니다.
늘 반대편 머리를 덮어서 가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분이 탈북하고 중국에서 탈북민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선교훈련을 받고 다시 북한선교사로 들어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사역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던 중에 머리가 없던 자리에서 노란 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일이 되자 맨살이던 흉터 자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완벽하게 자랐습니다.
방송에서 보니 선교사님 머리카락이 풍성하더군요.
탈북자로서 다시 북한에 선교사로 들어간다는 게 보통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큰 증거를 눈에 보이게 남겨 주신 것이죠.
이런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지만 실제로 이런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육체의 질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분명히 매일 견딜 힘을 주십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고 살게 하시려고 일용할 양식처럼, 하루의 건강만 보장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도 내일의 건강을 보장받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연약하기에 매일 주님을 바라본다면 오히려 우리 영혼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병이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병으로 파괴되지 않게 두시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주인을 떠나 제 마음대로 다니면 결과는 죽음입니다.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됩니다.
양은 눈이 나빠 코 앞에 절벽도 구분 못하고 추락해서 죽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다니는 사람들의 종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심판하시는 대신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에서 배웠던 번제처럼, 우리의 죄가 속제 제물이신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실 때 다른 한 쪽에서 우리의 죄악이 벗겨지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는 중에 구원을 받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이 이렇게 확실하게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선지자는 한탄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붙잡히신 성금요일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께 드릴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맞으신 게 아니라 제 죄와 허물 때문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2025년4월18일 성금요기도회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