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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라 (이사야서52장13절-53장3절)
남수연 2025-04-19 추천 0 댓글 0 조회 34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것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소중한 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애통하고 슬픈 것은 아주 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대속에 대해 잘 아는 지식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사람, 이사야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 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7백여년 전 사람입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히스기야가 눈물로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때 15년을 더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응답을 전해 준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중병에서 고침을 받고 낳은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므낫세는 남유다 최악의 왕으로 손꼽힙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데려가시겠다 할 때 그냥 갔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아들을 낳지 않았을테니까요.

공교롭게도 이사야선지자는 이 므낫세왕에 의해 톱으로 몸이 잘려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이런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에게는 그들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이죠.

이사야선지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서의 주된 내용은 타락에 대한 심판 경고와 회개 촉구입니다.

결국 돌이키지 않을 남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멸망할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징벌이 끝나면 다시 본토로 데려오실 것도 예언합니다.

그런 과거사로 끝났다면 우리가 이사야서를 적당히 읽어도 되겠죠.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구원에서 끝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원으로 확장됩니다.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원할 신비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웁니다.

여호와의 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에게는 이 여호와의 종은 지금도 미스테리한 인물입니다.

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죠.

정답인 예수님을 빼고 답을 구하니 알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 여호와의 종에 대한 정보를 네 편의 노래로 이사야서 속에 삽입해 놓으셨습니다.

당연히 이 네 편의 노래는 예수님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첫 번째 노래를 예로 들면, 우리가 다 아는 말씀입니다.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종이 대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시죠.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이 마지막 네 번째 노래에 해당합니다.

네 개의 노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여호와의 종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죠.

마지막 네 번째 노래에서는 여호와의 종의 고난의 비밀이 공개됩니다.

5213절부터 15절까지는, ‘여호와의 종에 대해 소개합니다.

53장은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난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2. 먼저 이 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지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1) 내 종이 형통하고 존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하나님이 보내신 종은 하나님의 뜻을 실패 없이 완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지극히 높아진다는 뜻이죠.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이것은 세 단계로 점점 더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삼단고음인 것이죠.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심으로, 점점 더 존귀하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하신 말씀과 믿음으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기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세상은 현실이고 하나님 나라는 가상현실일까요?

지진 한번 나면 사람들의 현실이던 모든 것들이 돌무더기가 됩니다.

뉴스에서 그런 재난 장면을 보면 현실감이 전혀 안 들죠.

거기 문명이 있었다는 게 일장춘몽 같습니다.

내 곁의 누군가의 죽음, 전쟁, 파산, 대 재난, 이런 것을 만나면 지금까지 현실이고 실체라 생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일시적이고 하나님만 영원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눈이 지극히 높아지신 예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더 놀랄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단지 예수님을 믿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지극히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 뿐 아니라 지극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해 지신 주님을 예배하시길 바랍니다.

 

2) 이어지는 다음 구절은 여호와의 종이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시냐입니다.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여호와의 종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놀랄만한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을 볼 때 저 사람은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당하신 모습에 놀란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고난으로 죄인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잖아요?

성도들도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이 가져올 승리를 또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도 세상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망하면 거의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굳게 의지하는 성도들이 재기하지 못한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믿음으로 살다 죽는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주영0씨 아버님이 미국에서 평생 작은 개척교회를 하다 지난 달 소천하셨습니다.

주목사님은 청담동에 있던 꽤 좋은 집을 헐값에 팔고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교회가 잘 된 적이 없었습니다.

사모였던 주영0씨 어머니는 평생 교회 옆에 있는 고등학교 청소부로 일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하나님만 위하는 데, 왜 도와주지 않으시는지 자식들은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목사님의 그런 초라한 사역을 실패로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생을 고지식하게 수고하고 돌아온 그 목사님을 두 팔 벌려 안아 주셨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든 게 형통한 것입니다.

주영0씨는 그 아버지 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 음악으로 뿐 아니라 복음성가를 작곡합니다.

또 새롭게 하소서 MC로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몇 명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죠.

설교 끝나고 주영0씨가 작곡한 찬양곡을 한번 들려드리겠습니다.

고생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하나님께 속상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예수님의 고난과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찬양입니다.

주영0씨는 새롭게 하소서에 나온 많은 간증 중에서 가장 은혜가 되는 것은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가난하다는 간증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오히려 우리 모습 같잖아요?

그런 성도들이 얼마나 장합니까?

예수님을 사람들이 놀랄 만큼 상하게 하신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때로 상하게 하십니다.

상한 마음이 없이 구원받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40년간 광야에서 오직 하루치 만나만으로 먹이신 게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그들을 시험하고 연단해서 낮추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제를 따지자면 애굽사람들 발밑에서 섬기던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40년간 낮추셔야 했을 만큼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신 다음 복을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타인보다 상하게 하고, 부족함을 알게 하십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면 제 머리가 텅빈 양철통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말씀을 보고 연구했는데, 이상하게 머리에 남아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집니다.

매일 하는 기도도 첫 마디를 시작할 때 늘 막막합니다.

만 시간 노력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죠.

왜 나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텅 비어야 하나님이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남보다 더 낮아지고, 더 상하게 되는 때 남들은 놀랄지라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낮추지 않으시고 높여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만인 앞에 지극히 높아지시는 그때에 우리도 영원히 높아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메시야의 구원이 모든 나라에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어떻게 강원도 크기 약소국에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 모든 나라에 전파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의 복음을 오히려 로마황제들이 받아들입니다.

복음의 혜택은 수천 년 간 이스라엘의 귀에만 들려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귀천이 없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3. 다음 53장에서 메시야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를 좀 더 자세히 전합니다.

1) 사람들이 메시야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오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큼 큰 고통이 있을까요?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은 내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한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죽음으로라도 진실을 증명하려고 하잖아요?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인격을 매도당하고 진실을 의심받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귀신들렸다면 얼마나 치욕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생들도 형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오해하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주님이 육신의 동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어요?

예수님이 그런 상황에 몰릴 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셨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전해보면 이사야의 이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우리도 처음엔 복음이 황당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지금도 주님에게 가장 큰 고난이고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메시야에게서 기대했던 외적인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만한 왕의 풍모와 배경과 힘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밝히는 여호와의 종은 그들의 생각과 다를 것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지만, 출생 당시 다윗의 혈통은 몰락한 왕조였습니다.

조선이 망한 뒤, 이씨 왕족들의 몰락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이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조는 이방인인 헤롯왕조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며 예수님의 족보를 넣었습니다.

그 족보를 따라가 보면 다윗왕이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임을 피력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게 아니면 진실도 거부합니다.

주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조건과 외모가 평범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건이 좋거나 외모가 뛰어나야 관심을 보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꽤 용모를 따졌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의 경우 용모가 어땠는지를 꼭 기록했습니다.

모세는 어릴 때 얼마나 영특하고 귀티 나게 생겼는지 애굽의 공주가 보고 한눈에 반해서 키우게 되었잖아요?

요셉과 다윗도 용모가 빼어났었다고 굳이 기록을 남겼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압살롬이 잘 생겨서 사람들 마음을 훔쳤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키가 다른 사람들 머리 하나만큼 더 컸다고 합니다.

출신이 좀 안 좋아도 외모가 뛰어나면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 마찬가지입니다.

범죄자인데도 미모가 뛰어나면 팬덤이 생기는 게 희한한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꾸며 줄 어떤 조건이나 외모나 강점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주님의 진실된 인격 하나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 하나님을 경외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인격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경외하던 그 하나님의 인격을 느낀 것이죠.

경건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고백했잖아요?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하나님을 경외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잖아요?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갖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예수님을 판단했던 유대인들과 똑같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다음 3절부터는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한 사람이 기록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사야서 53장을 보여주고 누구를 가리키냐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실제로 다 예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이 본문을 보여주고 대화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이 글이 누구를 말하는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모두 예수일 것 같다고 대답하더군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죽음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의 죽음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글이 어디에 있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다들 신약성경에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보고 기록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그들이 믿는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있다고 하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읽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유대교인들은 구약성경을 가르칠 때 이사야서 53장은 넘어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알아보도록 기록하신 것을 고의적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주신 구원과 축복을 얻지 못한 것이죠.

메시야가 당한 고난은 하나하나가 곧 우리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에 주님이 감당하신 극한의 고통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왜 주님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셨는지를 또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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