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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누가복음19장28절-36절)
남수연 2025-04-09 추천 0 댓글 0 조회 43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이 날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 중 첫째 날입니다.

우리 교회 달력으로 하면 다음 주일 날에 해당됩니다.

종려주일이라고 하죠.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했던 데서 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가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죠?

많이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복음서 4곳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복음서에 동일하게 기록된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 사건을 모두 중요하게 보았다는 것이죠.

뇌리에 깊이 박힐 만큼 강렬했었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닌 것 같잖아요?

오늘은 이 나귀 사건을 중심으로 한번 본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타고 가실 나귀를 빌리십니다.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 제자 둘을 보내시며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여리고에 사는 삭개오를 만나 구원하신 얘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오다 보면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이 나옵니다.

그 마을들을 지나면 감람산이 나오고 감람산을 넘으면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저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야 하는데 예수님께는 어린 나귀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하나의 그림으로 보자면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그림의 퍼즐조각들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이라는 예언은 한 개의 퍼즐 조각입니다.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도 한 개의 조각입니다.

많은 조각이 맞춰졌지만 아직 남은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가장 많은 퍼즐조각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정교하게 맞춰집니다.

이렇게 예언과 성취를 통해 대속을 이루신 것은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감동만 해서 믿게 하시는 것은 구원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시려면 뭐하러 이렇게 두꺼운 성경을 주셨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복음을 자세히 풀어서 가르쳤을 때 회심자가 생긴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믿게 되고 구원받는 것은 사람의 인생만큼이나 어렵고 심오합니다.

시편94편을 보면 하나님이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신다고 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어린 나귀 사건도 메시야의 대속을 맞출 한 개의 조각입니다.

메시야가 나귀새끼를 타고 온다는 것이 구약 스가랴서에 예고되어 있죠.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대통령이 방문한다면 의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우잖아요?

메시야왕의 행차에 대한 의전을 구약성경이 다 짜 놓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임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타고 들어 가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스가랴의 예언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나귀를 타신 왕이 구원을 베푼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구원을 베푸는 것은 위험에 빠진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고대에는 당연히 강대국에 억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억압에서 구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큰 힘을 가진 왕이 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구원을 베푸실 왕은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앞뒤가 잘 안 맞고 그림이 안 나오는 계획을 짜 놓으신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대로 행하시잖아요?

종려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백성들은 예수님이 뭔가 큰일을 벌이실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벌이실 큰일은 사람의 기대와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우리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의 길을 성급히 판단치 말아야 합니다.

 

2. 그 나귀를 어떻게 빌려야 할지를 제자들에게 지시하십니다.

30,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은 마치 마을 어딘가에 매여 있는 나귀를 보고 계시듯 말씀하죠.

그런데 예수님의 지시에 특이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나귀 새끼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에게 먼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빌려오는 게 상식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 순서를 바꾸신 거예요.

먼저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라.

주인이 왜 나귀를 푸냐고 물으면 그때, 주님이 쓰시겠다고 말하라는 것이죠.

우리 같으면 십중팔구 예수님 말씀을 바꿔서 이해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선 부탁, 후 대여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상식이니까요.

남의 것 그냥 손대면 절도죠.

제자들도 분명히 순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있다고 느꼈는지, 주님 지시대로 그대로 합니다.

마을에 들어가 보니 나귀가 매여 있는 게 보였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나귀가 거리에 매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나귀를 길가에 매어 놓겠습니까, 좀 수상하죠.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나귀새끼를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나귀를 보고 주님 말씀대로 먼저 줄을 풀고 있자니 나귀 임자가 묻습니다.

33,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완전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귀를 끌고 온 것입니다.

요즘 당나귀 한 마리를 분양 받는 데 평균 오백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나귀는 예수님 당시 가난한 서민들이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평생 나귀 한 마리를 소유해 보지 않으셨습니다.

전국을 전도하실 때 늘 걸어다니셨잖아요?

 

3. 그런 귀한 재산인 나귀를 왜 주인이 선뜻 내어준 것일까요?

1) 나귀 주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묵으셨던 곳이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오금동하고 가락동처럼 인근입니다.

얼마 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나사로를 보려고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머무셨던 나사로 집으로 몰려왔었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그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다 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성 안 사람들이 몰려 나와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이죠.

벳바게의 나귀 주인도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자 흔쾌히 내 놓았던 것이죠.

저는 좀 더 심층적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만일 나귀 주인이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면, 예수님께 나귀가 필요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스가랴의 예언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가에 나귀 새끼를 매어 놓았던 것 아닐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와서 그 나귀 새끼를 풀고 있는 것입니다.

웬 도둑질이냐, 화가 났을까요?

아니죠. 뭔가 가슴이 두근두근하지 않았을까요?

가져가도 되냐고 내 마음을 묻는 것과 내 마음을 이미 아신다는 것은 다르죠.

예수님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아셨지? 그런 것이죠.

뒤에 보면 비슷한 사건이 또 나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

제자들이 우리가 어디서 유월절 식탁을 준비할까요 하고 예수님께 묻죠.

그닥 크지 않은 예루살렘 성에 수만 명이 몰려왔던 때입니다.

열세 명의 장정들이 갑자기 식사할 곳을 마련하는 건 쉽지 않죠.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이상한 지시를 하십니다.

성 안에 가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가 예수님이 유월절 먹을 객실이 어디있냐 물으면 마련해 둔 다락방으로 안내할 거라고 하시죠.

제자들이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돼서 유월절 만찬을 먹은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잖아요?

미리 예약 해 놓으셨다는 게 아닙니다.

묻지 않고 준비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릴 때 아버지들은 참 늦게도 들어오셨습니다.

아예 안 들어오실 때도 종종 있었죠.

그런데도 어머니들은 아랫목에 아버지 밥그릇을 항상 묻어 두곤 했습니다.

추운데 있다가 돌아온 자식들이 후닥닥 아랫목에 발을 넣었다가 밥그릇 뚜껑이 열리곤 했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는 사랑도 모른 채, 예루살렘 사람들은 주님을 참혹한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 길엔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기록하여 기념해 줍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있었죠.

오늘 나귀 새끼를 준비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주님을 모실 수 있을까, 유월절 식사를 준비했던 마가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향품을 가져왔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요셉도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묘실을 주님께 내어 드렸죠.

당시 분위기가 예수님을 환대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는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출교하기로 결정했던 때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헌신은 그런 희생을 각오했던 것이죠.

하나님은 그런 사랑이라면 확인해 보지도 않고 받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기쁘게 여기시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받아주시는 것,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광인 것은 잘 모르는 편이죠.

한 원로목사님이 유튜브 채널 구독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더군요.

저도 그대로 한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기엔 큰 어려움 없이 대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목사님 자신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훈련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자기 차를 살 때는 하나님께도 차를 한 대 사드렸다고 합니다.

선교지에 그만한 가격의 차를 보냈다는 뜻입니다.

물론 재력이 뒷 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긴 하죠.

그렇게 평생 하나님 사랑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이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는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죠.

누가 자식을 사랑하려고 애를 씁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그것과 비교됨을 알고 부족함을 절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애쓰기에 그 목사님 생각에 너무나 공감이 됩니다.

저는 그래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처럼 저절로 사랑하는 것도 아름답죠.

그러나 내 의지를 다해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도 못지않게 귀합니다.

아직은 이것이 우리식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도 묻지 않고 받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다음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고난주간이지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목숨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고 다시한번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겠다 다짐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5년4월9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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