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요한계시록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편지의 처음 시작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내용이었죠.
이후 지상에선 교회와 사탄의 나라를 상징하는 영적 바벨론과의 싸움이 드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요한사도 시대의 바벨론은 로마제국입니다.
이 패턴은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 19장부터 마지막까지는 드디어 모든 지구 역사를 종결하는 최종사건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재림, 사탄과 영적 바벨론의 심판,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많아서 환타지 소설 같은 느낌이 들지만 요한사도가 직접 눈으로 본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부분입니다.
세상에서 박해를 견딘 성도들은 마지막 날, 드디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그 순간이 막 설레고 기다려지고 그러십니까?
솔직히 현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좀 낯설고 이질감도 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땅에서 남들처럼 살지 않고 평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삽니다.
그 결과로 얻을 영광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오늘 이것을 잘 이해하고 모든 성도님들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소망이 더 확실해지게 되길 바랍니다.
1.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예수님과 성도들의 최종 관계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다양하게 지칭하죠.
목자와 양,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도와의 최종적인 관계는 신랑과 신부입니다.
천국에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도 아니고 스승도 아닙니다.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신랑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창세기에서부터 보여주시는 것이 신랑과 신부입니다.
창세기2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보여주시죠.
그러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바울사도가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에베소성도들에게 가르치죠.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나와 아담과 결합하죠.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와 결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신부로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진실 된 사랑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잘 신뢰하지 않는 편이죠.
사실 선악과가 개입되면서 아담과 하와의 아름답던 부부관계는 불과 성경 한 장이 넘어간 창세기 3장에서 즉시 금이 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부부 사이는서로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말이죠.
부모의 자식 사랑은 어쩌면 일방적일지 모르지만, 부부의 사랑은 서로를 위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맡길 만큼 소중하기에 결혼하는 것이잖아요?
올해 초 가수 구준0씨의 안타까운 소식을 기사에서 읽었습니다.
구준0씨는 20여 년 전 대만에서 유명 여배우를 만나 연인이 됩니다.
그런데 국경을 넘나드는 장거리 연애가 쉽지는 않죠.
게다가 여배우 부모의 반대로 일 년 만에 헤어집니다.
구준0씨는 연인을 잊지 못했고, 이십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결혼했던 그 연인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뒤 두 사람은 재회했고 법적 부부가 됩니다.
그게 삼 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올 2월에 아내가 친정 식구들과 일본 여행 중 독감으로 인한 급성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이런 기구한 사랑이 있더군요.
그런데 최근 기사에 보니까 구준0씨가 다섯 달이 지난 지금도 매일 아내의 묘소를 찾아가 곁을 지킨다고 합니다.
사진에 보니 묘소 앞 접이식 의자에 앉아 태블릿 PC 속 아내의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묘소 주변에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기사 밑에 이런 댓글들이 달렸더군요.
너무 안됐다, 눈물 난다, 진짜 사랑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지나치면 병 된다.
어쨌든 아내에 대한 구준0씨의 사랑은 세상 어느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진실하고 애틋한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만일 아내를 살릴 수 있다면 구준0씨는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신랑이신 예수님이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아끼고 사랑하듯,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신랑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이 땅에서의 내 모든 눈물과 고통을 아십니다.
평생 아등바등하며 살아온 인생, 결국 이루지 못한 꿈, 마음에 깊게 박힌 가시와 상처들, 그런 것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면 얼마나 서먹할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보는 눈빛 한번에 우리의 모든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게 이해되고 용서되고 받아들여지는 거잖아요?
세상에선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하게 나를 채워주는 신랑 예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구원의 은혜만 받은 우리는 하나님 눈치 보며 살지 모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날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본문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알 수 있습니다.
7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1)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즐거움과 큰 기쁨의 잔치입니다.
지난 한 주, 무슨 즐거운 일이 있으셨습니까?
세상에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누리려면 치러야 할 댓가가 크죠.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는 즐거움을 위해 한 달간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합니까?
기쁨을 주는 관계가 되려면 나를 희생하지 않고는 어림도 없죠.
그러나 우리가 참여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는 그 안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행복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즐겁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만족시키는 기쁨과 행복이 영원히 흘러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도 거저 받았는 데 천국에서의 행복과 기쁨도 거저 받는 것이죠.
2) 혼인잔치의 기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수가 다 찼을 때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자신을 준비한 때입니다.
성도들 개인으로 볼 때는 그 날을 위해 항상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
3)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위해서는 신부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8절,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정확한 의미는 ‘그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주어졌다’ 입니다.
혼인잔치 신부의 옷은 신랑이 준 것입니다.
요즘은 결혼식을 앞둔 예비 부부가 드레스를 함께 고르는 드레스 투어를 합니다.
신부와 신랑의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선택해서 결혼식 당일에 입는 것이죠.
신부의 아름다운 드레스는 신랑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부로서 주님 곁에 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순결하고 진실하신 예수님 곁에서 주님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어떤 옷을 내가 준비해서 입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의 얼룩들을 깨끗이 지운 거룩한 옷이 신부의 예복입니다.
만일 주님 앞에 선 내가 평생 지은 죄로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때는 더 이상 죽을 수 없지만, 정말 죽고 싶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이 주시는 빛나고 깨끗한 예복을 가질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평생 어떻게 착하게 살든, 교회를 위해 얼마나 봉사했든, 세상에서 기부를 얼마나 많이 했든, 그것으로는 예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주님이 주시는 의의 옷을 간절히 구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셔서 입게 하신 옷인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게 좀 모순인 듯 보이죠.
물론 옳은 행실로 세마포 옷을 얻는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옳은’이라는 단어에는 ‘옳은 행동’이라는 뜻과 ‘법령’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법적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의 옷에 더해진 성도들의 옳은 행동이 신부의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화를 위한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 또한 우리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그게 뭐가 그리 소중한 것이라고, 미워하는 그 감정 하나를 우리는 내려놓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감정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돈 내려 놓을 수 있을까요?
체면 내려놓아질까요?
덜 중요하고 만만한 건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절대 내놓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옳은 행실을 이뤄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과 옳은 행실은 내게 예복을 주신 신랑의 명예를 높이는 것입니다.
3. 이런 천국의 어마어마한 광경을 목격한 요한사도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이제야 성도들의 고난의 의미와 이후의 모든 영광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환상들을 설명해 주는 천사에게 그만, 경배하려고 하죠.
그 마음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도 은행에서 대출 좀 해주면 왜 그렇게 감사합니까?
어차피 이자 받고 하는 장사고 대출 직원 돈도 아닌데, 고맙다고 막 그러죠.
의사가 사진 찍어보니 큰 문제가 없다고 하면 왜 그렇게 의사가 고맙습니까?
의사가 병이 없게 해 준 것도 아닌데요.
천사가 그 좋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로 고마우니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영광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천사가 요한의 경배를 만류합니다.
10절,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정확한 의미는 ‘나는, 너와 예수의 증거를 가진 너의 형제들의 종이다’
그런 뜻입니다.
결국 이 모든 영광의 마지막을 위해 일하고 희생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거를 받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거룩한 천사들조차도 우리의 이 사역을 위해 돕는 역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해석이 좀 애매한 마지막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이 구절은 앞에 원래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천사가 보여주든, 성도들이 행하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증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계시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증언은 성령께서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죠.
오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해 이해가 되셨습니까?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 양의 귀한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면 다른 즐거움으로는 만족이 안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조금 웃다가 맙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때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이 있음을 더 깨닫고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5년7월30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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