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매일성경이 역대상 말씀입니다.
묵상할 본문의 양이 꽤 많죠.
내용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족보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루하고 별 의미 없는 족보 같지만 이것은 단지 혈통이 아니라 성경에 흐르고 있는 혈맥입니다.
성경 전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성경에 불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꼼꼼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역대서는 다음 주부터 나누고 오늘은 빌립보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사도에게 고맙고도 각별한 교회죠.
유럽 선교에서 박해를 받으며 세워진 첫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사도의 선교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동역했습니다.
바울이 개척했어도 다른 교회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죠.
우리교회도 개척한 지 얼마 안 돼 몽골에 있는 교회와 줄곧 동역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주님의 교회들이 다 한 핏줄이지만 서로 헌신하는 관계는 각별할 수 밖에 없죠.
우리 성도님들도 서로에게 헌신하는 관계가 되어가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본문은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쓰는 옥중서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믿음의 경주에 더 박차를 가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청년 때는 이런 권면의 설교를 아주 달게 듣고 좋아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삶은 거의 직장과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봉사 많이 하는 게 성도의 마땅한 미덕이었죠.
지금처럼 여러 방면으로 분주한 시대에는 부담으로 들릴 말씀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아마 ‘무엇이 중헌디’ 그렇게 단호할 것입니다.
다만 계속 달려가는 자신의 믿음의 경주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우리도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신앙을 마음에 새기고 지키길 축복드립니다.
1. 바울사도는 모든 신앙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할지를 다시 가르쳐 줍니다.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우리 믿음의 영원한 주제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대속의 이치와 그 결과인 부활을 잘 모르면 늘 믿음이 불안정합니다.
믿음이 항상 견고해 보이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이 믿음의 중심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좀 오래 다녔다고 이제는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바울사도는 지금까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놓고 씨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주님이 계신 삼층천도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은혜를 더 알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바울의 헌신과 희생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관심이 항상 십자가와 부활에 있어야 겸손히 섬길 수 있고 능력있는 신앙이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내 심장을 뛰게 하지 않는다면 믿음과 삶은 무기력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의 영원한 미래입니다.
어떻게 주름져 가는 내 얼굴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관심을 두지 않을까요?
지금의 이 약한 내 몸이 아닌, 부활의 새 몸으로 갈아 끼우고 산다는 것이 생각하면 너무 벅차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바울사도가 짚고 가는 것은 주님이 고난 없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
부활에 이르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성경 지식으로 배우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실천과 경험으로 따라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을 못 박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밉던 곱던 내 자아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 그럴 것 같지만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자아를 사랑합니다.
불같이 화내는 사람도 그런 자기를 사랑하며 뒤 끝이 없다고 미화합니다.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바울도 한 성질하던 사람이잖아요?
죄악의 화신인 옛자아가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다는 걸 기억하고 주님이 주신 새마음이 아닌 옛 성품들은 미련없이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은 주님이 이루신 구원사역에 고난받으며 함께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는 그렇게 하다 옥에 갇힌 것이잖아요?
이 두 가지 고난에 깊이 참여할수록 부활에 대한 소망은 커집니다.
사람이 희생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거기에다 소망을 크게 갖겠습니까?
반대로 소망이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발적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쉽지 않죠.
우리에게 왜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난이 있습니까?
부활을 소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우리가 겪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이 천국 같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천사 같다면 굳이 본적도 없는 부활의 삶을 누가 갈망하겠습니까?
밋밋한 삶에서 어떤 사건이 터질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관심과 갈망이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면 부득불 타의에 의한 고난을 통해서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게 되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2. 그런데 11절 말씀을 보면 마치 바울사도의 구원이 미정이라는 것처럼 들리죠.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아직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성도들이 섣불리 자신의 구원을 낙관하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바울은 왜 갑자기 구원에 대해 신중론을 펼치는 것일까요?
유대교인들은 당시에도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 내가 구원 백성 자격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비해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해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게 아주 넓고도 깊은 내용들이 담겨있잖아요?
믿음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 구원이 확정된 듯이 태만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죠.
빌립보교회의 문제이기 보다 현대교회에 더 시급한 문제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내 자신에게도 구원은 아직이라고 말하며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아직 나의 믿음이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무슨 말일까요?
우리 힘만으로는 그렇게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잡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내가 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관심한 상태에 하나님은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다.
어느 시기엔 은혜의 단비가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것 같은 푸석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아무에게나 남발하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단계적입니다.
경건의 분량이 되지 않은 상태로 한번에 갑자기 큰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는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사울왕이 그 예입니다.
왕의 사명을 위해 성령의 감동을 주셨지만 본래 육적인 사람 사울은 결국 그 은혜를 지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구하며 나를 성장시키는 매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그렇기에 이미 이룬 것은 뒤돌아보지 말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사도만큼 이뤘음에도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기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이 잘 이해되죠.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선수가 끝까지 사력을 다해야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를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2022년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죠.
롤러스케이트 계주에서 1위를 달리던 한 선수가 결승선 바로 앞에서 금메달을 확신하며 기뻐하며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순간 달리던 속도가 줄었습니다.
그 때 뒤를 따라오던 대만 선수가 스케이트 날을 결승선에 밀어 넣었죠.
결과는 0.01초 차이로 대만에 금메달이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주자 뒤에서 태극기를 감고 기쁨의 세레머니를 하던 같은 팀 선수들도 다 경악했죠.
입대를 앞둔 선수들은 군면제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대만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축하할 때 난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승선이 어디입니까?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푯대는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의 푯대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설 내 모습을 오늘 만들어 가는 것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입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차곡차곡 나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소설에서 죽기 직전에 한 노인이 이런 독백을 합니다.
‘늙어가는 것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사람의 나이는 그 사람의 인생의 총합이며 그 중에서 단 하나의 숫자도 우리는 나중에 고칠 수 없다
증오 속에 죽어가는 이 늙은이를 만드는 데 60년이 걸렸구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됐었어야 했다’
죽음 앞에 선 지금 단 하나도 고칠 수가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죠.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쉬지 말고 꾸준히 달려야 합니다.
한번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평생 하나님께 헌신한 성도들이나 사역자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만하면 은퇴하고 쉽게 살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이 닿는 만큼 끝까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 한번이라도 더 읽고 싶어 하고, 끝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할 생각을 합니다.
저희 어머니도 췌장암으로 돌아가시던 그 해에도 아파트 정자에서 만난 할머니를 전도하셨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저희 교회에 한번 나오셨죠.
성도들의 신앙은 멈추지 않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은퇴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나를 푯대로 정하고 일평생을 꾸준히 달려가면 위에서 하나님은 부름의 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각자에게 부름의 상은 다를 것입니다.
구원은 동일하나 각 성도에게 맡기신 것이 다르고, 그 부르심에 각자가 응답한 헌신도 다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부름의 상을 주실 것입니다.
천국이 어차피 좋은 데 상 받는 게 대수인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야말로 내 고된 평생을 보상하고도 남을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상일 것입니다.
모두 다 푯대를 정하고 달려가 이 상을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2025년6월4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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