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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불 (레위기10장1절-11절)
남수연 2025-06-06 추천 0 댓글 0 조회 31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구약성도들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죠?

회개하고 동물제사로 속죄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동물의 속죄를 합법적으로 주셨고, 실제 효력이 있었습니다.

이 구약성도들의 제사에서 복음을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엄중한 제사제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지도 배우는 것입니다.

그동안 어려운 다섯 가지 제사를 배웠죠.

지난 주는 제사를 집례할 제사장의 위임식을 엄수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과 제사장이 된 아들들은 일주일 간 회막 안에서 모든 위임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백성들을 대표해 첫 제사를 드립니다.

여기까지 모세가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대로 철저히 지켜집니다.

그 결과 본문 바로 앞 924절에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번제단의 제물을 태우십니다.

이것은 세우신 제사제도가 실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걸 가시적으로 증명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동물의 제사를 드릴 때 받으시는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 광경에 놀란 사람들은 경외감에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1절 앞에 히브리어성경에는 그리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9장에서 이어진다는 뜻이죠.

이어서 또 한번의 놀랄 일이 일어납니다.

어제 위임식을 마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내려 죽게 된 것입니다.

제사드리다 죽다니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성경에 이런 경우가 여러 번 나오죠.

다윗이 즐겁게 하나님의 법궤를 성으로 모셔 올 때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댓다가 즉사했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그렇습니다.

부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두고 거짓말을 했다 죽습니다.

당시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에 능력과 사랑이 충만할 때입니다.

신앙이 고무되고 영적 분위기가 고조 될 때 찬물을 끼얹듯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악의 침투를 심판하셔서 바른 기준을 확립하시고 성도과 공동체를 보호하십니다.

이후로는 잘못했을 때마다 계속 불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바뀐 게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기준대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에 감정적인 반응을 먼저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꺼림직한 분들은 사실보다 감정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대선 후보 중에도 그냥 싫은 사람 있다잖아요?

주는 것 없이 싫다는 말은 우리가 진실보다 감정에 속는다는 걸 말해주죠.

오늘 본문 말씀도 그걸 먼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잘 이해한다면 믿음에 견고한 터를 다지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사건의 개요를 먼저 보겠습니다.

1, (그리고)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위임식 다음날, 백성들을 위한 첫 제사를 드린 후입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인 나답과 아비후가 벌인 일이죠.

성막에서 분향 하는데 불에 대한 제사의 규정을 어깁니다.

그래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이스라엘 전체가 충격에 빠집니다.

본문만으로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두루 종합해서 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한 게 무엇입니까?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만 어긴 게 아닙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말씀하신 제사법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어겼습니다.

분향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임무이지만, 출애굽기에서는 우선 아론에게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 제사장 둘이 상의도 없이 분향을 했다는 것이죠.

분향은 한 명이 해야 하는 데 둘이 성소에 들어간 것도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문제가 된 다른 불은 무엇일까요?

다른이라는 뜻은 불법적이라는 뜻과 일반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합법적인 특별한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막 안에 있는 등불을 켤 때나 분향을 할 때는 번제단에 있는 불을 사용하는 게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번제단에서 죄인을 대신한 제물을 태우는 불은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막 안에서 봉사하는 불은 그래서 번제단의 거룩한 불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번제단의 불은 24시간 꺼지지 않게 제사장이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향로에 담고 성막으로 들어가 분향을 했다는 것이죠.

다른 불은 무엇일까요?

밖에서 가져오진 않았겠죠.

그렇다면 성막 경내에 제단의 불 외에 또 어떤 불이 있었을까요?

화목제 제물을 삶는 불이 있었습니다.

조리용 불이죠.

그것도 회막 뜰에 있는 불이니 괜찮다 생각하고 그 불을 향로에 담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정확한 규례를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1절에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불이란 것을 보면 이미 명령하셨다는 거죠.

모세는 철저히 아론과 아들 제사장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가르치지 않아서 저들이 죽었다면, 모세는 하나님께 저를 죽이시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사람입니다.

제사장직을 십 년 한 것도 아니고, 어제 위임받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규정을 자기 마음대로 바꿨다는 것이죠.

몰라서 실수를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왜 나답과 아비후가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1) 하나님이 주신 제사 제도의 뜻에 무관심하고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에 대한 무지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 무수한 제사를 경험했습니다.

모든 종교의 예배 제도는 사람이 자기 편의대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예법을 죽은 조상이 명한 게 아니라 산 사람들이 만든 것이잖아요?

제사 의식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게 세상 종교입니다.

사제가 죄를 사하노라 하면 죄가 없어지는 게 종교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사람들 의식에 하나님의 대속 제사와 이방신에게 하던 제사가 분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신에겐 희생제물만 많이 바치면 됩니다.

절만 많이 하면 된다고도 하잖아요?

팔 일에 걸쳐 송아지와 양과 염소를 그만큼 드렸으면 됐다는 오해가 분향을 만만히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제사 제도의 뜻을 깊이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죄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고, 끊임없는 속죄가 필요하다는 걸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지 피상적으로만 아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를 생사의 문제로 알지 못하고 결국 가나안 종교로 바꿔 탑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이걸 보여주는 불길한 징조인 것입니다.

 

2) 또 이 사건은 명백히 나답과 아비후의 높아진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셨을 때 70인의 장로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격인 공동식사에 참여했으니 대단하잖아요?

영으로나 육으로나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은 죄성을 부풀릴 위험이 큽니다.

설령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 제도에 담긴 깊은 의미를 모른다 해도, 명령하신 말씀대로 순종할 수는 있잖아요?

경외하면 순종하기 쉽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주신 법에 주의하지 않은 것은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주의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이땅에서 복되게 사는 길입니다.

이사야서48장에서 하나님과 율법을 버리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17,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은 그렇게 복된 것입니다.

잠언 1620절에도 말씀하죠.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제가 축구예능을 좀 좋아합니다.

뭉찬에 나오는 팀원 중에 마선0 라는 보디빌더가 있습니다.

김종0 씨하고 함께 운동하며 유튜브에도 나오는 것 같더군요.

마집사가 보디빌더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합니다.

수영강사를 하던 어느날 큐티를 하는데 본문이 솔로몬 성전을 짓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 건축을 거의 두로사람인 후람이 주도합니다.

건축 기술자이고 정교한 금속세공의 실력자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도 실력과 기술이 있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데, 하나님 자녀들이 실력을 갖추면 얼마나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

그 당시 몸짱 열풍이 불던 때였습니다.

기왕 체육을 전공했으니 트레이너로 실력자가 돼 보자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트레이너가 되고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보디빌더 분야도 도전하게 됩니다.

한 지역에서 열린 대회에 처음 출전했는데 거기서 2등을 합니다.

자신감을 갖고 계속 모든 경기에 도전을 했지만 이후 십년 동안 단 한번도 수상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보디빌더들이 스테로이드를 사용해 더 근육이 커진 좋은 몸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집사는 약물을 사용하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과 운동을 통해서 정직하게 몸을 만들며 계속 도전했지만 약물 없이 입상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십년 만에 보디빌더는 접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에 네츄럴 보디빌딩이라는 장르가 들어옵니다.

약물 없이 자연 조건에서 몸을 만들어 겨루는 분야죠.

그 대회에 출전하자 첫 경기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됩니다.

이후로 2년 동안 각종 대회에서 30번 우승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십 년을 버텼더니 하나님이 결국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게 제일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의 즐거움을 다 뺏고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대로 안 살면 오히려 그런 마음이 더 듭니다.

말씀대로 지켜보면 큰 즐거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하나님 말씀 때문에 억눌렸던 분 있으십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억압에서 풀어 주십니다.

매일 자유를 누리며 살잖아요?

죄지으며 사는 것과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은 물론 다릅니다.

전에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며느리가 고국을 방문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2/3가 반년 동안 물에 잠기는 나라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빈곤 국가죠.

한국에 시집간 이웃집 딸이 왔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 전부가 모여서 잔치 분위기더군요.

흙바닥에서 음식하는 장모를 위해 한국사위가 새 주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스레인지와 찬장을 놓아 주었습니다.

주방이 완성되자 풍선을 매달고 커팅식을 하는 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가스레인지를 보러 한 시간 거리를 걸어서 구경하러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가스레인지가 그 동네의 자부심이 된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누구집에 TV 들여 놓으면 온 동네 관심사였죠.

마을의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스레인지에 요리하는 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우리는 한국에서 태어나게 해 주신 것 하나로 누리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빈민국의 가난한 세간살이를 보면 우리는 너무 사치스럽게 삽니다.

저희 아파트에 금요일마다 장이 섭니다.

지난 주 낮에 잠깐 나가서 과일하고 쑥갓하고 버섯을 사서 들고 들어오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수수한 삶이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단한 희생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희생은 예수님이 치르셨습니다.

그 구원의 큰 은혜를 누리며 우리 행복을 위해 주신 말씀에 주의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불의 심판 뒤에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입장을 밝히십니다.

1)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불의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죠.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접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자들은 그 거룩함 앞에서 두 가지 결과로 갈라집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사십 일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하죠.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얼굴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광채로 빛나게 되었죠.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는 거룩이 구원과 영광이 됩니다.

오늘 나답과 아비후도 하나님의 거룩을 대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그 거룩하심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자들이 마지막 날에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할 것입니다.

오늘의 나답과 아비후에 대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도 그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그런데 아론과 남은 아들들에게 장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너무 매정하신 것 아닌가요?

시신은 아론의 사촌형제를 지목해 진 밖으로 메고 가라고 하십니다.

5절을 보면, 죽은 제사장들을 옷 입은 채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하시죠.

옷이 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화로의 불이 옮겨붙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라는 걸 정확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도 행위를 금지시키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은 이미 하나님께 헌신되고 바쳐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애통하지 않으신 일에 제사장도 애통하면 안됩니다.

지금 아론과 남은 아들들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인간으로 애통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지만 제사장이기에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영영히 기억될 메시지가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이런 제사장을 신뢰하며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태도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걸 증명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재봅니다.

현실이 절망일 때 우리의 태도는 더욱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 보여줍니다.

지난 경북 산불 때 영덕에만 피해입은 교회가 34군데라고 합니다.

빛과소금교회는 교회와 사택이 완전히 전소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가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 타버린 교회를 막상 눈으로 보니 아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런 아내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내 손을 잡으면 자기 마음도 무너져서 함께 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가장들이 그래서 울고 싶어도 잘 못 울잖아요?

짧은 시간 갈등했다고 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 손을 잡아 줄 것이냐, 목사로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일 것이냐.

결국 아내 손을 잡아주지 않고 선 채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내의 손을 잡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저도 주저앉아 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내의 마음을 만져주세요.

저는 목사로서 이 일을 허용하신 하나님 편에 있겠습니다.

우리를 덮친 어떤 상황이든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고 견디는 게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삶의 어려운 문제에서마다 그렇게 하나님을 굳게 믿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자녀들은 안심하고 우리에게 믿음과 삶을 배울 것입니다.

이후 빛과소금교회에는 어디서 알았는지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으로 다시 건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다른 아들들의 애도를 금지하셨지만 대신 백성들에게 나답과 아비후를 애도하라고 합니다.

나는 슬픔을 억눌러야 하지만 온 국민들이 내 자식의 죽음을 슬퍼한다면 그래도 마음이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론과 동생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않으시는 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하셨다면 다른 무언가로 위로해 주시는 게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4. 이 일 후에 하나님은 아론에게 직접 제사장직에 대한 규율을 말씀해 주십니다.

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이 규정을 주신 것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혹시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순 실수를 심판하시겠습니까?

현 시점은 애굽을 나온지 이년 차인데 술이 남아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술을 빚었겠습니까?

광야에서 개인적으로 술을 마셨다는 내용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두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불순종과 교만이 본질입니다.

술을 금지하신 이유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이방신의 제사처럼 생각할 것을 차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을 걸고 금지시키신 것입니다.

고대 우상숭배 제사에는 술이 기본입니다.

먹고 마시고 뛰논다는 게 성경에서 우상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방신의 사제들 또한 술에 취한 상태로 신접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들어가서 살 가나안의 모든 나라가 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무엇인지 엄격히 구별하게 하시는 것이죠.

제사장이 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제사장이 정신 바짝 차리고 할 일을 말씀하죠.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게 제사장의 일입니다.

그것의 분별 기준은 다음 장에 다 나옵니다.

또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치는 게 제사장의 일입니다.

주술을 통해 미래를 말해주고 신의 뜻을 점지받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걸 이 말씀에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주신 제사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죄와 공존하지 못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주신 은혜의 방편이 속죄제사잖아요?

수없이 죽어야 하는 속죄동물들은 장차 오셔서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 주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그 의미를 모른다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따랐다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지와 교만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거룩한 심판의 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면 그것은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린 것처럼, 점점 곁길 신앙으로 빠지게 됨을 모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고 우리에게 복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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