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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3장8절-12절)
남수연 2020-05-12 추천 0 댓글 0 조회 846

5월 가정의 달에 우리 가정을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베드로사도가 그의 복음사역 마지막에 쓴 편지입니다.

일평생 전도하며 교회를 섬겼던 경험과 성령님의 감동으로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진술해 나간 내용입니다.

편지를 받을 사람은 박해를 피해 떠돌며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성도들이 고난 중에 낙심해서 혹시라도 믿음을 잃을까 염려했습니다.

구원의 소망,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을 온전히 바라라고 강하게 권고했었죠.

또 그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눈치 보며 살기도 힘든데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게 마음에 와 닿겠습니까?

그러나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거룩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때로는 전쟁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거룩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실생활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지를 앞에서 세세히 가르칩니다.

오늘 말씀 부분도 그 가운데 속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어떻게 거룩한 행실을 통해 가정과 생활의 터전을 복되게 할지 잘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1. 먼저 가까운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가족관계, 교회 성도간의 관계,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 동료들 간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내용들이죠.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동정, 형제사랑, 불쌍히 여김, 겸손으로 행하라는 것이죠.

이런 덕목들은 세상에서도 다 높이 평가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에서도 저 사람은 참 동정심이 많아, 저 사람은 참 겸손해서 좋더라이런 말을 하죠.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성경의 의미와는 본질과 깊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원 성경의 단어들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했잖아요?

그래서 때로는 이걸 다시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지켜야 할 덕목들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와 많이 다릅니다.

 

1) 먼저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라고 하셨죠?이전 개역성경에선 체휼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게 동정보다 더 나은 번역입니다.

체휼은 같은 처지가 되어서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그냥 남을 동정한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죠.

이 체휼이란 단어가 여기 말고 신약성경에서 한군데서 더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정하시는 것과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동정하라는 단어가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동정하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우리처럼 이 세상을 살아 보셨잖아요?

주님의 가정이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여러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장남으로서 생활고를 피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과의 사별의 아픔도 겪으셨고 형제들에게 오해도 받으셨습니다.

체휼은 그것을 겪어 본 사람들이 진심으로 공감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시기에 간구할 때 기꺼이 도와주신다는 말씀인 것이죠.

이 마음이 우리가 형제들에 대해 가져야 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죠.

심지어 가족들이 다 같은 환경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도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을 가족들도 똑같이 겪고 있다는 걸 자꾸 생각한다면 좀 더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따뜻이 대해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사용되는 사랑이란 단어를 쓰다 보니 본 뜻이 가려지는 것이죠.

성경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애착관계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랑할만한 조건이 되면 사랑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할만한 조건을 갖췄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에 따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내 감정을 제약하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 사랑도 본성적인 애착관계에 끌려 다니면 안됩니다.

그렇게 자녀를 사랑해도 자식을 망치고, 그렇게 자식이 맘에 맞지 않는다고 차별해도 망칩니다.

또 저 사람은 어쩐지 싫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좀 어렵죠.

그냥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한다면 감정적으로 훨씬 편하잖아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결국 감정이 충동하는 대로 애증의 소용돌이에 빠져 인생은 뼈아픈 실패와 불행만 맛보게 될 것입니다.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딱 그걸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 부부는 세상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준 것처럼 사는 것이 신자들의 가정이라고 지난 주 살펴 보았습니다.

사랑이 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에 의지해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감정이 아니기에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을 훈련시키실 때는 사랑할만한 사람들 가운데 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우리 곁에 데려다 놓으십니다.

미운 사람이 옆에 있다면 하나님이 데려다 놓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오늘 명령하신 대로 의지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상대도 안했을 사람들과 지금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다면 지금 훈련을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훈련을 기꺼이 감당할 때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깊은 형제사랑의 행복을 점점 느끼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애착이 가는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지 않게 믿음으로 잘 조절해야 합니다.

애착관계에만 매달려 더 깊은 사랑을 훈련해야 할 다른 곳엔 냉냉하다면 애착 대상을 우리에게서 떼어 놓기도 하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자식들이 다 부모 가슴에서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간이나 심장 같은 신체의 내부기관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자식이 아픔을 당하면 부모의 애간장이 타죠.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빚더미에 앉아 울고 있으면 부모는 집이라도 팔잖아요?

성도들이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저 사람 참 딱하게 되었구나가 아니라 그것이 내 문제가 되어 함께 고통을 나누는 걸 말합니다.

특히 이 가정의 달에 우리는 가족들이 직장생활에, 육아에, 공부에 지쳐가는 것을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짐을 나눠지고 집안일도 분담하며 수고를 덜어준다면 조금은 더 따뜻한 가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4)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순종한다 해도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면 남을 무시하게 됩니다.

가족 간에도 제일 빈정 상할 때가 언제입니까?

나를 무시할 때잖아요?

심지어 사랑하는 자식일지라도 내게 그러면 상처가 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무시당할 때 상처는 물론 가장 큰 절망감을 느끼고 나쁜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겸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가족관계에서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교만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었기에 하나님은 교만을 병적으로 경계하시고 교만에는 절대로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다.

겸손은 우리가 가장 마지막까지 훈련해야 할 성품임을 알고 부단히 마음을 낮추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리고 9절 말씀은 우리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우리를 박해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관계가 먼 사람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족과 친구들 가운데도 내게 대한 호의를 접고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정말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본성은 내게 한 개의 악을 가하면 두 개 세 개로 갚아 주고 싶은데요.

말없이 참는 것만 해도 보통 수양이 아닌데 잘되길 빌어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욕먹는 상황을 겪어 보셨습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뒷통수를 맞고, 잘 해준 건 생각 않고 작은 꼬투리를 잡아 공격할 때 더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복을 빌어 줍니까?

그러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대가 어떻게 날 모욕하고 다니든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나 자신의 실체보다 심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잘 도와주고 욕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제가 어떤 죄인인지를 알았던 터라 그게 그렇게 화가 나고 속상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인이 박힌 표징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인식입니다.

남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거듭난 신자들은 정말 나 같은 죄인이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 남이 나를 아무리 나쁘게 얘기한다 해도 사실은 감춰진 내 실체보다 심한 게 아닌 것이죠.

내가 큰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깊이 받지 않는 역설이 있습니다.

그런 나를 사랑하고 목숨을 버려서 구해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저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거품을 무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죄의 깊이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조차 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이어서 나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는 다른 죄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도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혹독한 고통을 주시고 그들이 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인자하시다고 하셨고, 실제로 주님께 악을 행하는 사람을 어떻게 인자하게 대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죠.

지금도 하나님은 온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을 주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걸 욕심껏 갖는 사람이 있고,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세상에는 늘 그늘진 곳이 있고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 가운데 주님의 자녀들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시는 것이죠.

분명한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없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백배는 더 파괴되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만 해도 그래요.

만일 우리가 믿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이 나빴을 것이고, 훨씬 더 냉냉하고 메마른 가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싸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복을 빌어주라는 것은 본래 사람에게 주셨던 그 명령을 다시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과 사명을 주시잖아요?

인간의 범죄로 망가진 세상에서 그 사명을 다시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죠.

참고 복을 빌어주는 것은 우리가 약하고 모자라서 기가 죽어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선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번 이천 화재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죠.

그런데 합동분향소에 분향하러 갔던 전 국무총리와 유족들 간에 좀 문제가 있었잖아요?

유족들이 대책을 가져왔냐고 묻자 이전총리가 지금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는 쪽으로 대답한 게 문제의 발단이 된 것 같습니다.

한 야당 국회위원이 이 전총리를 향해 가슴 없는 정치의 전형이라며 소름이 끼친다고 맹렬히 비난했죠.

그런데 이 전총리께서 그 사건을 직접 사과하며 그 비난에도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비판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좋은 충고를 해 주신데 감사하다

등골이 오싹하다고 맹공을 퍼붓던 야당 의원은 하루 만에 이 전 총리를 대인배라고 추켜 세웠더군요.

이전총리도 얼마든지 자기 입장을 변명하고 정당함을 입증할 수 있었겠죠.

사람들은 꼭 그 사람이 옳다고 해서 지지하지 않습니다.

옳은 건 알겠는데 정서적으로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때로는 억울함을 입증하는 것보다 오히려 작은 잘못이라도 인정하는 게 더 낫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려면 그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도량과 내면의 탄탄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민하게 상대를 비난하는 사람일수록 열등감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악한 자들을 참아 주고 그들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주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에게 그만한 저력과 자부심과 당장의 손해를 여유 있게 수용할 수 있을만한 크고 견고한 하늘의 유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손해보면 얼마든지 더 보충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조차도 복을 빌어줄 수 있다면 그만큼 예수님 안에서 지금 부요함과 강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영적리더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든 두 사람만 모여도 누군가는 리더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도해야 할 입장인데 수궁하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도 자식을 위해 늘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기도할 때 자식들이 그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잖아요?네로황제의 피의 박해에서 성도들은 그들의 복을 빌어주며 순교했다고 교회사는 기록하죠.

결국 로마는 기독교에 순복하고 국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정이든 사회생활이든 기도하며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다스리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원리임을 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10절 부터는 시편 33편을 인용해서 몇 가지 권고를 덧붙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특히 언어에 대한 거룩을 강조하는 것이죠.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힘써 왔던 경건을 한순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나쁜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인격이 뭉텅 절삭되는 것입니다.

점잖은 사람 입에서 못되고 경박한 말이 나올 때 사람을 다시 보게 되죠.

말은 변명할 여지없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말해줍니다.

또 절대로 말에 날을 세우면 안됩니다.

말로 받은 상처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는 우리 각자가 다 경험했잖아요?

다음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어떤 종류의 악도 우리 안에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내면 속에는 음울하고 어두운 방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내가 당한 악행에 대한 미움, 상처, 슬픔, 분노가 있습니다.

다 잊은 것 같은데도 그게 들춰지면 아직도 아프죠.

또 남들 모르게 숨겨 놓은 어떤 습관적인 죄도 그 방에 있습니다.

실패감과 성공한 사람을 향한 시기심, 가정환경에 대한 원망, 이런 것들도 그 방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받은 상처이지만 이게 해결되지 못하면 결국 내게 독소가 되고 나쁜 성품으로 변질됩니다.

나쁜 성품에선 결국 악이 나옵니다.

도덕적인 어떤 죄든 멀리해야 하지만 이런 제거되지 않은 쓴 뿌리와 어두운 상처들도 빛 되신 하나님 앞으로 끌고 나와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평하지 않은 상대가 아무도 없는, 심지어 나 자신과도 화평한 그런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일반적인 은총과 별개로 우리를 축복하고 돌보아 주십니다.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일반적인 사랑을 모두에게 베푸시고 세상을 보존하시지만 각 사람의 선과 악을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십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시며 많은 것을 그냥 더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많은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전부 다 기도하고 받은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주님의 귀는 이런 성도들의 간구에 기울이고 계십니다.

많은 것을 그냥 주시지만 어떤 것은 기도해야 하고, 오래 기도해야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진심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구하는지, 동기가 옳은지, 간절한지, 꼭 필요한지, 이런 것을 살펴보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그런 것을 깨닫게 하시고 결국 나도 인정하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근본적인 성향을 부인하고 끊임없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가야 합니다.

물론 구원의 주체도 하나님이시고 성화의 주체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해도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긴 어렵습니다.

가정의 달, 외롭고 삶에 지친 우리 가족들을 돌아보는 달입니다.

서로를 동정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교만한 마음으로 무례히 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악을 행하고 모욕하는 사람까지도 우리를 통해 복을 받길 기도할 때 우리도 끊임없이 복을 이어받게 될 것입니다.

또 항상 좋은 말을 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시고, 주님의 귀는 우리에게 기울이셔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풍성한 복을 우리와 우리 가정에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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