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리에 앉지 마라
누가복음14장1절-14절
오늘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식사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보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을 탐색할 목적으로 식사에 초대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오늘 초대도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증거를 잡으려는 목적입니다.
1절부터 내용을 보면 그들이 일부러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데려다 놓았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안식일 규례에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준수를 완벽하게 지킨답시고 유대인들이 세부적으로 추가해 놓은 조항입니다.
평소처럼 예수님께서 오늘 병자를 고쳐주시면 안식일계명을 지키지 않는 죄인으로 몰아세우려는 것이죠.
율법대로 병자를 그냥 돌려보낼 것이냐, 평소 하셨던 대로 병자에 대한 긍휼로 치료해 주실 것이냐 올가미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단 한마디의 말로 그들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예수님께는 모두가 다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아들들입니다.
부모가 죽을 자식을 건져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반면 이를 통해 병자와 약자에 대해 무자비한 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이웃사랑에 대한 율법의 본질에 완전히 어긋난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것이죠.
그리고 본문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불꽃 튀는 쟁점이 있은 뒤 다들 떡을 먹으러 식탁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이번엔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단성을 밝혀내자는 명분으로 의기투합했지만 결국 속마음은 제각각 자기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자리다툼하는 모습을 보면 속내가 다 드러나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사람만 그런게 아니더군요.
이번에 야당 창당 60년 기념 현수막 때문에 고성이 오갔다고 하죠.
현수막 중앙에 김영0 대통령 사진이 들어갔고 왼쪽 구석에 김대0대통령이, 오른쪽 구석에 노무0대통령 사진이 배치가 되었다는 이유였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자리다툼을 하겠습니까?
그걸 문제 삼는 분들의 계파 간 갈등이 드러난 것이겠죠.
정작 오늘 초대 받은 예수님은 끝자리에 대충 앉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리다툼을 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관찰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시편 138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주목해 보시고 그런 행동의 내면 무엇이 있는지와 그 심각한 결과를 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얼핏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처세술처럼 보입니다.
결혼식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주책맞게 상석에 가서 앉지 말라는 것이죠.
만일 주인에게 더 귀한 손님이 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 남아있는 말석에 가서 앉아야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때 웃음거리가 되고 창피할 게 분명하죠.
비슷한 경험들이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예 끝자리에 앉아 있으면 주인이 와서 상석으로 부를 때 사람들 중에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처세술이 아니라 분명히 비유라고 누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비유라는 것은 심오한 진리를, 이해하기 쉬운 실생활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죠.
주님의 비유 속에 영적인 중대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비유의 배경을 혼인 잔치집으로 한 것은 성경에서 종말에 완성 될 하나님의 나라를 항상 혼인 잔치집에 비유한다는 것으로 볼 때 오늘 비유가 마지막 심판과 구원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즐거운 게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먹을 때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 특히 혼인잔치를 벌인 식탁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나라에서 즐길 영생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의미는 영적인 종말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구원의 좌석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기준에 턱도 없이 못 미치면서도 구원을 확신했고 그들을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장차 어떻게 반전될 것인지를 비유를 통해 분명히 예고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잔치가 시작되면 그들이 맨 끝으로 밀어냈던 예수님은 영광스런 자리에 앉으시고 그들은 주인 곁에서 밀려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대로 결국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우월하게 여겼던 유대민족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구원의 잔치 자리에서 멀찍이 밀려 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 이적을 보이시고 흠이 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이신 예수님을 미워하고 거부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십자가형벌에 내 준 것은 주님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8장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알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라서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들 같은 죄인인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잘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피차 죄인이니 서로 오케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이 싫어서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뉴스에 삼백만년 전 고대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원숭이류와 인간 사이에 끊어졌던 연결고리가 될 것처럼 보도하더군요.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되었다면 하루 아침에 변한 게 아니겠죠.
그렇다면 그 변천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인종들이 존재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들이 남아있어야 되는 데, 그게 없었다는 말입니다.
진화에 의해 인간이 생겼다고 가설을 세웠지만 그동안 증거들이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가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그동안 진화가 과학적 학설인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했던 것이죠.
아직까지 진화론자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내놓았던 달랑 몇 조각의 유인원의 화석도 조작된 것으로 이미 다 밝혀졌습니다.
아직도 과학교과서가 수정되지 않고 그것을 진실인양 수록해 놓은 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이번에도 그냥 키가 작은 부족이나 영장류의 뼈를 대충 맞춘 것일 것입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중간 단계인 유인원의 화석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원숭이는 원숭이로 사람은 사람으로 창조하셨으니까요.
과학은 분명히 진화가 아니라 창조를 뒷받침해 줍니다.
삼백만년전이라는 연대 측정도 현대 과학으로 그렇게 오랜 기간을 측정해 내지 못합니다.
오천년 까지가 생물체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한계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것은 발굴자들이 두개골의 생긴 모양을 보고 자기들이 만든 진화 연대표에 따라 연대를 추측한 것이지 과학적 검증을 거친게 아닙니다.
발굴된 뼈들이 너무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보통 몇백년만 지나도 뼈가 다 풍화되고 삭아서 바스러지는 데 사진 속 두개골이 아주 싱싱하더군요.
그런데 그 뉴스 아래로 지나가는 자막뉴스를 보니 성경과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다윈의 편지가 경매에 나왔다고 절묘하게 딱 매치시켜서 뜨더군요.
이런 내용들을 그냥 보면 누구나 성경과 하나님의 창조와 십자가의 구속에 대해 불신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윈은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말합니다.
불가지론자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죄에 빠진 세상을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 구원하시고 종말에 모든 것을 심판하여 바로 세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기가 싫어서 불가지론자 행세를 하는 것이고, 인류의 조상이라는 화석이 나오면 열광하며 그걸 믿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도 이렇게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간섭을 거부하는 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연합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아예 매장시키려고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경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확신하지 않으면 이런 대풍이 강타할 때 흔들거리다 훅 넘어갑니다.
우리는 시대가 조작하고 만들어낸 어떤 기만도 믿지 않고 성경과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단지 못된 인격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항상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춰간다면 그렇게 교만을 떨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우월감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남보다 민첩하고 영민해서 우월감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주셔서 그렇게 타고난 것 아닙니까?
부지런한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을 은근 멸시하는 데, 대개 부지런한 사람들은 체력과 건강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약골들은 부지런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머리가 좋고, 학력이 높고, 재산이 많은 것도 다 하나님께서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 유리한 조건으로 출발했기 때문 아닙니까?
오래 신앙생활에서 성경을 많이 알고 믿음이 있다면 일찍 우리를 불러내 주셨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가 나은 조건을 위해 무엇을 한게 아닙니다.
그것으로 남보다 우월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조건을 타고 나지 못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고 그 모든 것을 내게 담아서 나를 빚어주셨다는 것을 인식할수록 자랑할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비하시키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신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평가 기준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기준에 다른 사람들을 달아보고 내가 대단한 존재로 착각을 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도 남들이 보면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죠.
하나님은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이 인간과 하나님을 곤경에 빠트린 주범이기에 신자들의 교만을 엄중하게 다루십니다.
내세울게 아무 것도 남아나지 않도록 철저히 깎아 내리십니다.
욥기 3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경고하시는 이유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지금 고통 받고 아픈 게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무안을 당하고 ?겨 나는 것보다 백배 낫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천성적 교만은 천의 얼굴로 둔갑해서 때로 겸손을 가장해 남을 속이고 자신도 속습니다.
그 본심은 오직 은밀하게 자기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에도 숨겨진 교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것은 뒤로 빠져 방관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나설만한 무대가 되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줘야 비로서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속에도 무서운 교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하찮게 여기던 목수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한번도 뒤로 빼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자들이 ‘목수가 메시야라니’ 하고 조롱하며 비웃는 것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만 한결 같이 충성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판단과 험담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핑계하고 뒤로 빠져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미약하더라도 하나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되게 거들려는 것이 겸손한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으면 당연히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낮은 자리에서 내 신앙과 남의 신앙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낮은 자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 상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 죄악의 태고적 시발점인 교만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의 교만은 지독한 자기애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 쉽게 캐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다급한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생각하고, 어느 누구의 일에도 자기의 손익을 가장 먼저 계산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닮아 가는 신앙 성숙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무너뜨리는 게 있다면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가 같이 사소한 사람들은 매일 교만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교만을 다스리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낮추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는 현재 우리의 겸손과 교만이 장차 우리의 영원한 지위를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어떤 성도들은 ‘난 천국에서 상급 받으려고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 크게 신경 안 쓴다’는 말을 해 당황하게 만듭니다.
굉장히 욕심이 없고 고상한 신앙 같이 보이지만 그 사람이 실생활에서 돈이 더 들어오는 일에 그렇게 초연할지 궁금합니다.
그건 겸손한 게 아니라 천국에 대한 현실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저는 천국에서 받을 보상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솔직히 집에서 편히 쉬며 TV로 예배를 시청하는 것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낮은데 가라는 말씀대로 자신을 낮추며 섬기는 사람들의 결말이 같다면 그것은 공정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어떤 종류의 차이든 분명히 있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분명히 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이 있다면 그게 무슨 천국이냐, 천국은 모두가 똑같이 좋은 곳이라고 하며 근거 없는 억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통해서만 공평하게 들어가고, 이 땅에서 믿음의 성숙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수고한 만큼 공평하게 인정을 받습니다.
또 자신을 낮추는 것은 천국에서만 상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천국을 위해서만 통하고 이 땅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법칙도 당연히 동일하게 적용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낮춘다면 현재의 삶에서도 복이 되고 이 땅에서도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낮추고 겸손하게 남을 대할 때 우리 환경과 상황들이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가족 간에 관계가 왜 나빠지고 큰 소리가 납니까?
서로 무시당했다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무시당하면 살맛이 나겠습니까?
서로를 겸손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위해준다면 가정에서 얼굴 붉힐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큰일이라도 가족들의 힘으로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회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꺾고 남 앞에 겸손한 걸 비굴하다고 생각하고 싫어하지만 남이 또 교만한 꼴은 절대로 못 봅니다.
누구나 겸손한 사람을 신임하고 옆에 가까이 두고 싶어합니다.
하버드대학 입학사정관제에서 불합격자 1순위는 교만한자라고 합니다.
겸손이 우리를 높여주고 교만이 우릴 무참하게 넘어뜨린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낮아지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던 성자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고 죽기 위해 오셨는데, 저들이 그걸 거절하고 모욕과 멸시로 주님을 대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고, 맨 끝자리를 드리며 노골적으로 주님을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남에게 대접받지 못할 신분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셨고 공생애 내내 권력자들에게 이런 홀대를 받으셨습니다.
떠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고 침뱉음과 온갖 모욕과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희생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령하나님께서 죄로 오염 된 우리 안에서 기꺼이 내주하시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섬길 수 있을 때는 사랑할 때 밖에 없습니다.
부모라면 기꺼이 자식들의 발아래 허리를 굽히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엉덩이를 닦아줍니다.
거기다 뽀뽀도 하잖아요?
지난주에 미숙자매가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 아무 것도 안 들고 빈손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었더니 뒤이어 규탁형제가 미숙자매 가방을 매고 나타나더군요.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가방모찌를 해줍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섬겨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만유의 심판자로 높여주셨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높아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다가 장차 높은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저 사람 앞에서는 겸손해 지기 싫고, 본 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저런 사람을 위해 참고 이렇게 까지 섬겨야 돼? ’ 하며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수도 없이 든다면 우리가 낮은 자리에 앉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복된 증거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겸손이 우리가 마땅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낮은 자리에 앉으려면 어떻게 해야되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이 낮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뻔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기도는 죄성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방책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원치 않는 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갖고 모든 것을 마음껏 행하도록 하셨지만 유일하게 우리 자유의지에 개입할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열려진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개입을 요청할 때입니다.
우리의 교만이 죽을죄라는 것을 알고, 힘써 노력하고, 좀 겸손해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고개를 쳐든 교만을 통탄해 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우리 마음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하며 하나님께 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악한 죄성을 만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문이실 뿐 아니라 매일의 죄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승리의 문입니다.
매순간 우리 죄의 본성을 미워하고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를 기뻐하는 마음상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제 겸손하게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며 구원의 역사에 보람차게 함께 하는 복된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고, 우리가 무릎을 꿇고 섬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겸손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닮으려고 기도하며 노력할 때 주님께서 오셔서 반드시 우리를 높여주시고 모든 것을 보상하시며 영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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