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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주일설교 -마지막 유월절과 첫 성만찬(누가복음22장1절-20절)
남수연 2014-10-30 추천 0 댓글 0 조회 1433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례는 교회가 지켜야 할 두 가지 거룩한 예식인 세례식과 성찬식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시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으로 우리의 구원과 은혜를 위해 꼭 필요한 예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례식을 행하기 전에 주신 말씀을 통해 성찬식의 의미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1절부터 7절까지에서는 2천년전 예수님의 성만찬이 있었던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있었던 현장을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1절을 보면 이때가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본문을 기준으로 약 천오백년 전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2백만 민족을 모세가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밤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보통 광복하면 우리나라처럼 지배자들이 떠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전 민족이 애굽을 탈출해 2백만명의 긴 행렬을 이루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특이한 해방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굉장한 민족의 대 탈출이었던 것이죠.

이때 이스라엘을 끝까지 억류하려는 이집트에게 하나님은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바로왕이 이스라엘을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심판을 받던 그 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은 집집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에 바르고 어린 양의 고기를 먹으며 출애굽을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피를 볼 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은 뛰어 넘어갈거라는 것입니다.

같은 애굽 땅 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과 애굽인들 사이의 구분은 대문에 어린 양의 피가 묻어있느냐 없느냐였고 그것을 기준으로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가느냐 사망하느냐가 결정된 것입니다.

유월이란 말은 뛰어넘다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을 뛰어넘어가 구원을 받은 이 날을 기념하는 명절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정도 되면 이 유월절의 의미들을 벌써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바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 된 삶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그 사건을 통해 미리 예표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바로 이 유월절 명절이고 이 유월절에 인류의 속죄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과 현재 우리가 정확히 연결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은혜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이 되면 10만명의 넘는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리 크지 않은 고대 도시가 떠들썩하고 시끌벅적 했을 것입니다.

이날 예루살렘 도시에서 우리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팽팽하게 긴장된 채 명절을 맞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입니다.

앞 부분을 보면 이스라엘 전역을 순회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을 수많은 무리가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누구도 행하지 못했던 기적과 말씀의 능력으로 백성들을 이끄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백성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번 명절에 뭔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벗어날 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번의 출애굽의 해방과 같은 기적이 이번 유월절에 일어날지 모른다는 흥분이 도시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전 인류의 죄로 부터의 대탈출의 길이 이 밤에 열린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대대적으로 남자 성인들이 집결하는 명절에 빈번히 일어나는 민란 때문에 극도로 긴장된 때입니다.

명절에는 상시 주둔군 외에 더 많은 군사들이 파병되곤 했습니다.

이때 민란의 낌새가 있으면 즉각적으로 처리해야 큰 소요를 막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이 체포 되시고 단 하루 만에 십자가 사형판결이 나고 형 집행이 즉시 이루어진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기도 합니다.

한편 또 하나의 그룹은 2절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이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는지는 여러가지 복잡한 심리적 요인과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 유대종교 전통에 대한 위기감, 예수님께서 감히 자신들을 정죄했다는 분노와 모욕감도 원인이었겠죠.

또 예수님을 중심으로 쿠데타라도 일어나면 불똥이 자기들에게도 튈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할 때, 이렇게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이 조용히 죽어주셔야 독립전쟁에 대한 기대로 고조된 백성들이 수그러들테고, 로마군의 진압도 없을테고, 자기들의 기득권과 재산도 안전하게 보장되는 것이죠.

그런데 원래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사실은 그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예언한 것이라고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재해석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입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여러가지 속셈으로 하루 빨리 예수님을 제거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이 쉽게 해결되게 된 것이죠.

내부 고발자인 유다가 이들을 찾아와 예수님을 옹호하는 군중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넘겨주겠다고 은밀한 협상을 제의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의 기대와 탐욕과 배신의 긴장감이 터질듯이 팽배한 중에 사탄이 가룟유다를 이용해 예수님의 목을 조르려고 독사의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폭풍전야와 같은 밤, 모든 에너지가 다 예루살렘에 집중된 것 같은 밤이 바로 오늘 성만찬의 배경인 것입니다.

다음 7절부터 13절까지는 성만찬의 장소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성만찬 장소를 섭외한 내용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동일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볼만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과 유월절 명절 음식을 함께 드실 만찬의 장소가 준비된 방법이 신비스럽고 한편 좀 이해가 안되는 묘한 면이 있습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 유월절 먹을 곳을 준비하라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십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장소를 당일 날 즉석에서 찾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10만의 순례객이 운집한 예루살렘 성내에 여관이고 음식점이고 이미 만원사례가 아니었겠습니까?

또 명절 대목엔 왠만한 방이나 식당은 부르는 게 값이었을 것입니다.

명절에 올라온 예수님 일행은 마땅히 묵을 곳이 없이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으로 가서 노숙을 하셨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정도 여유가 없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명절 파티를 하시자니 베드로와 요한이 많이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 준비하길 원하시나이까라고 묻는 말은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뜻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텐데 그 사람을 따라 가서 집주인에게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을 보여 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나갔더니 정말 물동이를 인 사람을 만났고, 주인을 찾아가 그대로 말했더니,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내 주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많은 이적들이 있었지만 이런 당위성이 없어 보이는 요상한 일은 몇 번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기에 마태, 마가, 누가가 동일하게 복음서에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아무리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된 뜻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불가능이라 말해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날 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꼭 제자들과 함께 잡수셔야 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도 문제될 수는 없습니다.

또 불가능한 일을 제자들에게 시키실리가 없으시고 혹시 그래 보인다면 반드시 무언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일이 어떻게 성사되는 지를 우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지 않은 무언가를 다른 누군가가 이미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쪽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그 사람의 도움과 헌신을 통해 이쪽과 일을 맞춰 가시는 것입니다.

갑자기 원하던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다락방에 모임 장소를 마련해 놓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이것을 준비했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이 미리 예약을 해 놓으시고 물동이 암호를 정해놓은 것은 아닙니다.

다락방 주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날 명절을 보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기 집을 제공해드리고 편안한 식사를 대접하길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서 왔다면 어디 묵을 것인지, 이런 데 당연히 우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 주인의 진심을 멀리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와 저 답을 예수님은 연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멀리 답이 있어도 끌어다 쓸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그걸 끌어다 우리 문제를 풀어주실 수 있으십니다.

제자들은 돈도 없고, 시간도 촉박하고, 명절이라는 불가능한 조건들만 생각했지만 예수님께는 이래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영적인 의미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주셨을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주시기 위해 그 장소도 스스로 예비해주신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는 순간과 믿음으로 사는 모든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친히 준비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항상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능력 없는 부모라 해도 자식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고 하는 데 하나님아버지께서 뭐가 부족해서 우리 것을 축내시겠습니까?

인생에 필요한 모든 영육간의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하루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셨던 예수님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분이신지를 오늘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상황이 나쁘다고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다들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주변에 빈 집이 없어도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살 곳을 마련해주십니다.

팔아야 할 집은 아무리 비수기라도 반드시 팔리게 해주십니다.

들어가게 할 대학이면 때로 성적과 무관하게 들어가게 하시고,

다녀야 할 직장이면 스팩과 상관없이 문을 열어주시기도 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만나게 이끌어 주십니다.

이게 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이 되어야만 모든 일이 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며 섬기는 우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맞은 답을 찾아다 이 답답한 문제에 연결시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조급하지 말고 주시는 지혜와 환경으로 잘 인도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음 14절부터 20절까지는 마지막 유월절과 첫 성만찬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 중에서 우리의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반 정도 구속사역을 위해 제자들과 일하셨는데, 아마도 다 같이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기는 처음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을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고,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사역은 완전히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은 마지막 유월절이 되는 것입니다.

해마다 죽었던 수많은 유월절 어린 양이 상징하던 완전한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속죄의 사역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유월절은 필요치가 않은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의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함께 있기를 원하고 원했다고 하십니다.

왜 아니시겠습니까?

군대를 가는 것도 아쉬워 이사람 저사람 밥 먹자는 사람이 많고, 직장을 옮겨도 이런 저런 송별회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에서 정말 제자들과 마지막 명절 식사를 따뜻하게 나누고 싶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없이 남겨질 제자들을 위로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안해하지 않도록 전부 다 보여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를 유월절 만찬을 통해 직접 나눠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17절과 19절에서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감사기도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양이 되시길 주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셨고 기꺼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마음이시라는 것이 감사로 기도하는 모습에서 다 느껴집니다.

이 희생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감사가 나왔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이 다 집행되도록 묵묵히 그 고통과 수치와 아픔을 다 참아내신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원주민들이 양을 잡아 저녁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이 어찌나 양을 도축하는 데 선수인지, 양의 핏줄 하나 건드리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다 발라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렇게 산채로 도축당하는 과정에서 양이 미동도 않고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죽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할 속죄의 어린 양이 되셨을 때 꼭 이렇게 고통의 신음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않으시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이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모습을 7백년 전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미 구약성경에 이렇게도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도 노골적으로 예언이 되었다는 것이 참 신비하고 그것을 매일 보면서도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고난과 속죄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도 참 신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 부분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지원하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않겠다는 말씀을 두 번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씩 강조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내일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인류의 속죄사역을 마치시면 다시 성자하나님이 가지셨던 천상의 영광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전에 누리셨던 모든 영화와 존귀와 완전한 행복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가셔서 혼자 누리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로 와서 함께 이 좋은 것을 누리기 전까지 주님이 기쁨을 보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러시겠습니까?

이제 제자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완수할 것입니다.

때로 모욕도 당하고, 죽임도 당하고, 고초와 환란을 당할 제자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도 마땅히 누릴 모든 영광을 보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로 돌아와 영광을 받게 될 때 그때 잔치의 기쁨을 함께 누리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쉬시며 방관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고 직접 인도하시며 모든 고난에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만찬을 마치고 아버지께 드린 기도를 요한복음에서 보면 이들을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이 땅에서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환란이 많은 이 세상에서 정해진 때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살아야 하기에 주님께서도 천상의 즐거움을 보류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보호하시고 모든 길에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에 주님은 우리를 위한 기도를 덧붙이셨습니다.

요한복음17장20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보존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의 모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 주님 앞에 갔을 때 영광스런 천상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찬식을 제정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포도주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은 그 계획되었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져 종료되었지만 새로운 성찬식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이 찢기시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든 피를 다 쏟으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을 기념하고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을 계속해서 생각하라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을 쉬지 않고 공치사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이 이해도 할 수 없고 계산도 안되는 희생이 무엇 때문인지를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 숨돌릴 틈도 없이 닥쳐오는 삶의 시련들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목숨을 주시며 나를 사랑하셨다는 이 사실, 내가 그런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모든 고난 중에 눈물을 씻겨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해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서에서 주신 말씀처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영광을 함께 받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유월절이 첫 성찬식으로 이어진 그날 밤의 진실들이 잘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성찬식을 거행할 때 나를 향해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말씀을 근거로 더 깊이 깨닫고 믿어지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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