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레위기의 번제에 대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레위기는 애굽을 탈출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주시는 제사법과 일상의 규범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주도하는 레위지파를 따서 레위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레위기는 우리에게 현재 적용되지 않는 구약의 제사법이라 흥미를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어떻게든 죄악 된 인간 들 중에 가까이 계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느껴지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어느 성경보다 더 예수님의 속죄의 모형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을 잘 모르면 십자가의 대속의 이치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정립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 나온 동물제사는 현재 이스라엘에서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경우 제사는 반드시 성전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서기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스라엘엔 성전이 없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레위기의 이 동물제사를 드리길 간절히 열망하지만 드릴 수가 없는 것이죠.
아직도 이스라엘이 여호와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짓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단 한 곳에만 성전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26장14절을 보면 이렇게 성전에 대해 명령하십니다.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그 곳이 예루살렘이었고 예루살렘이 아니면 제사를 드릴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못을 박아놓으신 것이죠.
묘하게도 예루살렘 성전 터엔 지금 이슬람의 황금돔 사원이 버티고 있습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동물제사를 완전히 차단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더 이상의 동물제사는 필요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 동물제사를 우리가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레위기의 제사법은 과거에 끝난 지루한 내용이라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지루한 책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제물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는 만큼 극적이고 역동적인 의미가 담긴 성경입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이 어릴 때 집에서 닭 잡는 장면을 보고 기겁을 하신 이야기를 하더군요.
명절이 되서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옛날엔 어머니들이 곧잘 닭을 잡곤 하셨죠.
경험이 부족했던 그 어머니가 닭을 잡는 데 칼로 닭의 목을 친 것입니다.
목을 비틀어 죽여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닭의 목을 칼로 치려다 끔찍해서 주춤하신 거예요.
그 바람에 단 칼에 목을 베지 못하고 일부가 덜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이 상상이 되십니까?
목이 덜렁 거리고 붙어있는 닭은 죽겠다고 꼬꼬댁거리며 부엌을 날라 다니는 데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사방에 튀는 그 기괴한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합니다.
닭 정도 크기의 가축을 잡을 때도 참 이렇게 도살하는 장면은 끔찍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물로 잡는 것은 소나 양입니다.
큰 짐승의 목을 따고 가죽을 다 벗기고 내장을 꺼내고, 뼈 마디를 따라 조각을 내야 하는 제사의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상번제로 매일 아침저녁 번제가 드려졌습니다.
또 개인의 죄를 위한 번제가 수시로 드려졌으니 도축장과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사장의 얼굴과 옷에도 피가 튀어 엉망이 되었겠죠.
성경에는 문자적인 설명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모형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오늘 레위기를 이렇게 그림언어로 이해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해 현실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동물제사의 그림언어에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낭자하게 피를 흘리시고 찢기시며 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중첩되는 것을 느낍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을 통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무엇보다 더욱 명료하게 깨닫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날은 그 제사의 형식이 사라졌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지정한 제사제도의 목적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다만 그 속죄물이 가축이 아닌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제사법 안에 어떻게 예수님의 속죄의 모티브를 담아 두셨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견고한 진리를 바로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 번제라는 제사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성막으로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산에 모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언약식을 체결하신 뒤 백성 중에서 거하실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성막 건축을 완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번엔 거기에서 받으실 예물을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상당한 비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선물이 필요하고 제물에 목이 마르셔서 그러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제사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 속에 사람들 가까이 거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염원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편에서야 제사는 더욱 절실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말씀한 대로 제사로만 속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정해주신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해 나갈 동반자로 삼으셨지만 태생이 죄인인지라 대책이 없거든요.
죄가 피부같이 몸에 붙어버린 죄인들이 죄를 안 지을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무언가 속죄할 게 필요하다는 것이죠.
거듭 죄를 짓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위해서는 속죄의 제사방법을 주시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지었을 때 동물을 대신 바치는 구약의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도 그 축복과 은혜 안에서 항상 받아들여져야 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축복의 백성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했던 동물제사법 안에는 우리가 항상 은혜 안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의미와 신약시대의 의미를 잘 비교하며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대로 죄인의 죄를 속죄하는 번제를 순서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제물을 드릴 사람은 제물이 될 짐승을 골라야 합니다.
제물의 자격은 2절에 보면 가축 중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생동물은 절대로 제물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가축이어야 하고 살아있는 생축이어야 합니다.
피를 흘릴 수 없는 죽은 동물은 제물의 자격이 안됩니다.
성경 히브리서는 이것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생명은 생명으로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산 제물이 대신 죽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3절을 보면 흠이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값이 나가는 최상품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물 값과 선물 받을 사람의 중요도는 비례하죠?
우리가 선물을 고를 때 상대의 가치를 가늠해서 값을 매기지 않습니까?
귀한 상대일수록 선물의 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무성의한 선물을 받으면 되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형편을 다 아는 식구끼리라고 서로에게 돈쓰는게 인색하면 결국 기분이 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는 내가 가진 최상의 것으로 섬겨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보배롭고 귀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독생자를 우리의 생명의 값을 치러주시기 위해 주신 것은 정말 지나친 낭비가 아니십니까?
정말 하나님은 과도하게 낭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께 귀한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보면 우리 역시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 그래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예물이 아니면 진정성이 없는 것이기에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비싸고 귀한 것이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수송아지 한 마리의 값이 지금도 삼백만원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암송아지는 새끼를 낳기 때문에 더 비쌀 것 같은 데 오히려 백만원정도가 더 싸더군요.
수송아지를 드리라는 이야기는 성차별이 아니라, 말하자면 더 비싼 것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흠이 없는 짐승을 고른다는 것은 제물을 고르는 데 상당한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비싼 것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건 아닙니다.
뒤에 이어서 나오는 제물들을 보면 형편에 따라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정 가난하면 집비둘기도 제물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한 제물이면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조건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있는 제물은 남의 흠을 가려 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값비싼 제물이 예표하는 것은 흠 없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참 절묘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최고의 제물을 되어 주신 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도 최상의 것과 최선의 마음으로 섬기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다음, 3절을 보면 제물은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제물은 반드시 하나님이 지정하고 머무시는 장소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려고 구별한 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와 축복은 죄가 없는 깨끗한 중에 임하신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사야59장1절에서 죄악 된 삶을 청산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감지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소원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지정하신 이 성막은 구속사적으로 물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오직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서 드릴 때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악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정확히 달아보시고 제물이 그 죄에 합당한 가치인지를 계산하십니다.
미달하는 제물로는 죄를 속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달아보니 소나 양 같은 제물로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커녕 적대시하고 능멸하는 인간의 죄악을 속할 제물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한 제물, 흠없고 티없는 어린 양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 앞이라는 임재의식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는 신앙적인 삶과 예배는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 의견과 소원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눈을 보듯이 살아계신 예수님의 얼굴을 주목하며 그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애쓰게 되지 않습니까?
기도는 혼자의 독백이 아니고 치성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내 눈을 맞추고 실제적이고 진실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눈을 맞추면 기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우주의 주인이시지만 나를 주목하시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매순간 기억하고 의지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다음 4절부터는 제물을 번제로 드리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수라는 단어는 가만히 번제물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누른다는 뜻입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라고 하시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전가를 말합니다.
번제로 바쳐 질 제물의 머리에 힘을 주어 누른다는 것은 내 죄와 형벌이 너에게 전가되어지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내 죄로 인한 심판과 저주가 내게서 제물에게 옮겨져야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끊쳐지지 않는 절박한 염원으로 힘껏 의지를 다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동물머리에 대고 누른다고 내 죄가 거기로 옮겨가겠습니까?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수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로 심판을 받을 처지라는 것을 절박하게 느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내 죄가 주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절박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자녀가 된 것이죠.
또 하나는 제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부터 네가 내가 되어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아달라는 것이죠.
번제단에서 불 탈 것은 제물이지만 사실 죄를 지은 내 자신이 불타고 있는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저주받을 나는 지금 불타는 저 제물이 되어 죽어 없어지고 새롭게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죠.
제물에 안수한다는 것은 예물을 드리는 자가 자신의 죄를 통렬히 자백하고 의지를 다해 죄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어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안수해야지만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기쁘게 받으심이 되고 속죄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 죄과가 주님께로 옮겨갔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죄악 중에 출생했던 과거의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동일시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나는 새롭게 태어났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죠.
그 다음 본격적으로 희생제물이 번제가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5절에 여호와 앞에서 예배자가 직접 제물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제물이 죽을 때 예배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죽고 형체도 몰라보게 각이 떠지는 제물의 운명을 똑똑히 보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곧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속죄하는 피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장에게 부여하신 이 임무는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의 역할을 예표하는 것이죠.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인 대제사장 예수님이 동물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단번에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자는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뼈마디를 따라 잘라내 각을 뜹니다.
이 때 제사장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의 모든 것을 다 올려놓습니다.
그 다음 내장과 정강이 부위의 더러운 것들을 물로 깨끗이 씻으면 제사장이 나머지를 마저 제단위에 불살라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단에서 불타는 제물을 바라보며 예배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심판을 대신 할 제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예배자는 죄의 끔찍한 결과를 현장에서 바라보며 다시는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예배와 삶에도 이런 요소들이 다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제물을 불사르는 화제의 방법으로 제물을 통채로 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9절에 보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물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갈 때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롭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이 마지막 구절이 특별히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왜 죄없는 약한 동물이 악독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번제로 타오르는 냄새를 왜 향기롭다고 표현하셨을까요?
두 가지 의미로 깨달아졌습니다.
하나는, 제물이 죽음으로 그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를 인식하고 제물로 하나님께 화해를 구하는 그 냄새가 하나님께는 안심이 되는 향기로운 냄새인 것입니다.
호되게 야단맞은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수그리고 들어올 때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안도가 됩니까?
또 하나는 제물이 타는 냄새를 통해 하나님은 장차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실 예수님의 구속을 상기하시며 향기로움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버리셔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신 그 헌신의 행동을 만족하게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죠.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십자가의 속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두려워하고 마지못해 속죄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출산할 때 그 고통을 생각하면 모든 임산부들이 두려운 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품에 안을 기쁨에 당연하게 출산의 고통을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품에 안으실 기대와 기쁨으로 기꺼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후회없는 사랑을 깨닫고 느낀 사람들은 구원받을 영혼들을 향해 그런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26살의 꽃같은 나이에 우리나라에 와 8개월 만에 급성맹장염으로 죽은 루비 켄드릭의 양화진 묘역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만일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
가장 귀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것을 위한 헌신과 희생에는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값어치를 알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번제를 통해 다각적인 면에서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번제물도 예수님, 피를 들고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가는 제사장도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성막도 예수님.
유대인에게 이 동물제사를 지시하신 것은 장차 이렇게 죄문제로 허덕이는 인간을 영원히 속죄해주실 영원한 속죄양을 기다리라는 뜻이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감격에 차 소리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겸손하게 동물제사로 자신의 죄를 돌이키는 게 아니라 불손과 경거망동으로 하나님의 선의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흠없는 제물이 아니라 눈멀고 병든 제물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막상 제물을 드릴 때 자신의 죄악된 행위를 회개하고 버려야 하는 제사에 담긴 핵심사상은 내버리고 이스라엘은 죄악과 범죄가 만연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고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지만 이스라엘처럼 형식만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저버리고 종교인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은 결국 참 제물이 되려 오신 예수님을 욕보이고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성전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기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고 처참하게 살륙 당했습니다.
이번에 14시간이나 걸린 비행기 안에서 로마 콜롯세움에 대한 다큐영화를 보았습니다.
콜로세움 경기장은 바닥에 물을 채우고 배를 띄워 해전의 모습을 재현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 거대한 콜롯세움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 서기 72년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함락했던 티투스 장군의 아버지 베스파시우스가 황제로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재정은 그런 화려하고 웅대한 규모의 경기장을 건축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콜롯세움 한 쪽 벽면에 기록된 글귀를 보면 이 경기장은 전리품으로 세워졌다라고 써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한 수많은 금과 전리품으로 로마의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이 세워진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광장 입구에 있는 티투스장군의 기념비를 보면 성전 안에 있던 일곱가지 금촛대와 각종 기물들을 메고 끌려오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부조로 남아있습니다.
1948년에 독립한 이스라엘이 국장깃발을 만들 때 성전에 있던 메노라라는 금촛대를 상징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바로 이 기념비의 부조대로 도안한 것입니다.
가장 신빙성있는 메노라의 본래 형태가 바로 부조 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죠.
그 때 약 백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륙되고 오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로마로 끌려와 이 콜롯세움을 건축하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콜로세움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하에서 경기장 중앙으로 투사들이 불쑥 솟아나는 극적 효과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동력은 다름 아닌 유대인 포로들이 바퀴를 돌려서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선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 죄를 우리와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허세를 부리던 그들의 말대로 무섭게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흠없고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님을 묵살한 유대인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속죄할 제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일생의 모든 죄값은 다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예배는 단지 은혜로운 분위기나 낭만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뚝뚝 떨어지는 그 속죄의 은혜를 뒤짚어 쓰고 우리가 하나님아버지께 나아갈 때 우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잖게 하나님보좌 앞으로 나갈만큼 깨끗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뿌리 깊은 내 죄성을 성령의 은총으로 깨달은 자들만이 십자가의 제물되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으로 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며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이 레위기의 제사를 통해 온전히 발견하고 깨닫고 우리도 기꺼이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 가장 가치있는 삶인 산 제물로 바치는 삶이 될 수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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