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이 있은 지 3년이 되었습니다.
3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뉴스를 통해서 본 가족들의 모습에선 아직 눈물이 채 씻겨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죽은 아들의 휴대폰번호를 지우지 못한 한 아버지는 그리움이 사무칠 때 마다 아들의 번호를 꾹 눌러 본다고 합니다.
이젠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번호고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지만 아직도 그 번호를 지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는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숨진 아들 생각에 한 겨울에도 차마 보일러를 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3주기를 맞아 사고 해역에 오니 사지가 부서지는 것 같다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인간의 힘으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교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아무도 죽음을 피해가진 못합니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할 것 같던 사람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결말입니다.
오늘 죽음으로 설교를 시작하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침통해집니까?
사람이 인식을 하지 못하는 중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깊은 곳에 잠재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무거운 그림자를 펴고 심령을 짓누르는 것이 사망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사망의 권세와 두려움을 이깁니다.
죽음 다음 세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영광스런 주님처럼 부활한 몸으로 아버지 집에서 영원한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영생의 삶이죠.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이 많으신 데 정말 환영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마침 부활절이라 부활에 대한 설교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누리는 많은 축복에 대해서 듣지는 못하시겠지만 어쩌면 이 한편의 설교가 죽음 뒤에 만나게 될 영원한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지 누가 알겠습니까?
죽음 뒤에 부활이 없다면 여기 나와 앉아계실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 서있지 않을겁니다.
복음전도자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우리는 부활과 영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아무에게도 공격받을 까닭이 없는 점잖은 고등종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원수를 사랑해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라. 이런 숭고한 계명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이 칭송하는 고상한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말도 안되는 억측을 믿는 어리석은 종교로 세상에 비쳐지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일까요?
그 증거는 있는 것일까요?
만일 실제로 부활하셨다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하고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와 마주해야 합니다.
믿고 싶지 않다 해도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기록된 것들이 진실이란 얘기고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였다는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우리는 이렇게 과거의 내 마음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천국을 믿고 착한 일을 하고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멋있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오늘 읽은 본문 내용 그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진실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부활신앙을 말씀 위에 더욱 견고하게 세워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도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마태사도는 그 날 제자들이 보았던 부활 사건의 전모를 한 편의 신문기사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몇 사람들이 등장하는 본문에서 숨은그림찾기처럼 부활의 증거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역사교과서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 된 4대 성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성경에서만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오직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기록을 통해 남겨져 있는 셈이죠.
성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다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반대자들에겐 단 한번도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필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울 사람은 자기 쪽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죠.
부활에 대한 제3의 증인이 없으니 주님의 부활은 불리해지고 신빙성이 없는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는 중에 우리는 부활의 진실성을 발견하던지 아니면 의혹을 발견하던지 둘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귀를 열어주셔서 설교에 집중하고 진리를 더 깊이 깨닫는 축복을 부어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죽음의 절망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절망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불과 일 주일 전엔 수많은 군중들이 열광적으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었는 데 지금은 죽어서 무덤에 묻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그 아침은 너무 낯설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저도 가장 친했던 친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데 화사하게 핀 봄꽃들이 대체 왜 피어있는 지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아들을 군대 보낸 어머니의 아침도, 연애를 끝낸 연인의 아침도, 사업을 접은 사람의 아침도 이와 비슷하겠죠.
제자들은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예루살렘 근처 은신처에서 숨을 죽이고 드러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에게 말을 걸지 않는 침묵 속에 각기 벽을 보고 누워있고 무기력한 잠에 빠져있는 모습이 부활절 아침 제자들의 모습이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부활의 기사가 기록된 사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이 날 그들에겐 부활에 대한 털끝만한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6절을 보면 천사가 이렇게 말하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 것을 앞 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단 한사람도 주님이 부활하실 것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믿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처참한 주님의 죽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이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예수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 날 무덤 주변에는 숨어서라도 지켜보는 제자들이 몇 명은 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날 아침 무덤 주변에 제자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어쩌면 이들은 주님의 죽음에 절망하고 두려움과 허탈감에 빠져 차라리 모든 것이 이걸로 다 끝나길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지고 혼신의 힘을 다하다 탈진한 순간 차라리 모든 것을 접고 싶은 마음을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의 진실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본문1절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을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갑작스레 체포되시고 불법 재판을 거쳐 하루 만에 사형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던 것이죠.
다른 성경에 보면 여인들은 육중한 무덤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어 걱정하며 갔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묘는 동굴처럼 판 무덤에 시체를 안치하고 커다란 돌문으로 입구를 막는 형식이었습니다.
부자들의 묘는 도굴을 막기 위해 2톤 정도가 되는 엄청난 무게의 돌문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갑작스런 죽음에 무덤이 준비되지 않았던 예수님은 부자였던 제자 아리마대요셉이라는 사람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부잣집 무덤돌문의 무게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니 이들이 당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며 터가 요동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무덤 문을 굴려버린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돌문을 냅다 차버리는 재미있는 상상을 합니다.
이 두렵고 눈이 부신 천사의 형상에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적인 존재를 대면할 때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신접한 강신무가 쏘아보면 오싹해지는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천사는 두려워하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했다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기쁨으로 벅차 제자들에게 뛰어가고 경비병은 혼비백산해서 대제사장에게 뛰어갑니다.
경비병들이 죽은 사람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죠?
앞 장을 보면 그들이 죽은 사람의 무덤을 지키게 된 사연이 나옵니다.
62절 부터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제자들도 믿지 않았던 부활을 주님을 죽인 무리들은 믿고 있었다는 느낌이 니 좀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목이 달아날 엄청난 실책입니다.
혼이 나간 것 같은 경비병의 증언을 듣고 대제사장은 문책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주고 입막음을 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읽은 대로 잠자는 사이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라는 것이죠.
그리고 경비병들이 그렇게 소문을 낸 결과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체 도난설이 두루 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진실성을 한 가지 더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게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었다면 그들이 무덤 문을 열고 시신을 공개하면 될 일이었죠.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시신이 없어진 것을 시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시체를 도난당했다는 꾸며낸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습니까?
그 무거운 돌문을 굴려내는 데 그걸 모르고 경비병이 계속 자고 있었다니요.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쳤던 제자들이 주님이 완전히 죽은 마당에 무슨 용기를 내서 시신을 훔치러 가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반대파인 제사장들이 확실하게 확인해 준 셈이고, 제자들이 빼돌린 게 아니라면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혹시 제자들이 빼돌렸다고 가정한다면 그 이후 제자들의 돌변한 행동과 연결시킬 수 없는 모순이 생깁니다.
자기들이 시신을 감추고 목숨을 내놓고 부활했다고 떠들다 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 얘기죠.
사람이 그렇게 개죽음을 자초할 만큼 미련합니까?
지난 주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부터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제자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 했고 모두 붙잡혀 죽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제자들의 이 급진적인 변화는 어떤 강력한 계기가 있었다 걸 말해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돌변한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성경을 보실까요?
사도행전5장에서 베드로가 부활을 전하다가 공회 앞에 끌려가서 하는 말에 과거에 두려워 벌벌 떨던 베드로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기독교 초기에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혁시킨 것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내세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변화 된 우리들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 세속적이고 이 땅에서 성공과 이익만을 행해 달려오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설득해서 나를 희생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도록 만들겠습니까?
사람이 바뀌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사람이 좀 달라지면 저 사람 죽을 때가 됐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이 자기를 억지로 바꾸려고 해보세요, 절대 안 바뀝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고 그 능력으로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나0순복음교회에는 11년째 전도왕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인0안수집사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성경책을 7번이나 찢었다고 합니다.
찢은 성경 종이로 담배까지 말아 피웠다니 얼마나 예수님을 박해하고 싫어한 사람인지 알 수 있죠.
하여튼 ‘예수’라는 말만 들으면 화가 폭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그를 위해 퍽도 오래 기도를 했는 데 하루는 이상하게 기도원에 한번만 같이 가자고 간곡하게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김집사님은 당연히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겨울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낚시를 하던 중 그만 얼음이 깨져 호수에 쑥 빠져 버린 것입니다.
살겠다고 허우적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음 호수에 빠지면 짚고 나와야 할 주변 얼음이 미끄러워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얼음은 점점 부서져 나가고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바로 그때 불과 1초 사이에 그동안 지내온 모든 인생이 주마등처럼 번쩍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고 박해했던 지 기가막혔습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 때 간절한 애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주님. 살려만 주시면 이전에 저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던 사람, 괴롭혀서 교회 못나가는 사람들 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찰나의 짧은 기도였지만 진심을 다한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이상하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달아나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얼음 가장자리를 붙들고 버티던 팔에 힘이 다 빠지고 이젠 손을 놓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누군가 허리 뒤에서 두 손으로 밀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거기에 분명 아무도 없는 데 그 두 손이 그를 물 밖으로 밀어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는 얼음판 위에 엎드려 통곡하며 자기가 그렇게 미워했던 예수님이 자기를 구해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뒤바뀐 인생을 사는 김집사님의 삶이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제자들의 그 설명이 불가능한 돌발적인 행동, 예수님을 믿고 달라진 성도들의 이런 변화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음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빈 무덤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덤이 있지만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무덤은 인도의 능수해안에 있습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무덤도 중국 산둥성 공림에 있고, 이슬람교의 창사자인 마호메트의 무덤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고인에 대한 예우로 무덤은 절대 손상하지 않습니다.
유명인의 무덤일수록 잘 보존하고 얼마나 화려하고 굉장하게 꾸밉니까?
키르키즈스탄이란 나라가 있는 데 그 나라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마나스장군이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나 마나스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가 태어난 생가와 묘역을 성대하고 꾸며놓고 거기에 대단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마나스장군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그 나라 유명 작가의 책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가상의 인물에다가도 묘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없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고 그것이 바로 부활해서 시신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해 마음 속에 정리가 되십니까?
그러나 사실이라고 사람들이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돌문을 굴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장면은 경비병과 마리아와 똑같이 목격한 사실입니다.
둘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부활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믿게 해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혜택을 주는 것일까요?
2천년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게 도대체 나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아주 연관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다음 세계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다음에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미리 입증해 주는 사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15장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20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죽음 뒤에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이 멀게 느껴지십니까?
리챠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시 후면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죽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직면해 있지 않습니까?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우리가 대단하게 여기는 육체라고 하는 이 얇은 천막밖에는 없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면 육체가 얼마나 약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이 얇은 천막을 거두고 난 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영화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영생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환희이고 얼마나 믿음직한 보장입니까?
이 세상에서도 부활신앙은 현실의 모든 두려움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본장의 마지막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기 까지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우리 몫의 삶을 다 살았을 때 두려움 없이 다음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다른 것은 이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도 죽음에 대해 좀 겁은 나지만 그렇게 두렵고 불안한 것하고는 다릅니다.
오래 전 영국 덜햄 지방에서 석탄갱도가 무너져 164명이 매몰되어 숨지는 참혹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시신을 발굴해내던 중 글이 씌어있는 한 판자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그 판자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화요일 오후 2시”
지하에 매몰 된 광부들은 구조를 기다리다 산소가 떨어지고 죽음에 직면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준비하며 깜깜한 갱도 안에서 기도회를 가졌던 것이죠.
그리고 이들은 곧 죽음을 통과해 들어갈 영생과 부활을 확신하며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명제를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인생에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최초로 마리아에게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십니다.
심령에 평강이 있으십니까?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에 내 삶에 생기는 작은 일에도 불안하고 건강이 염려되고 내일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두려움을 제하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평안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평안한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다음 성경 어디에도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염려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그들과 같은 평강을 주셔서 늘 잔잔한 샘물과 같은 기쁨과 평안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줄 믿습니다.
혹시 생활의 염려와 육체의 피곤함으로 평안이 사라진 것 같지만 고개를 들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변함없는 그 평안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얼마나 우리의 축복인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어부로 돌아갔겠지요.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 죽지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제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부활을 전했고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이 전해진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생의 쓸쓸하고 허무한 말로가 어떤지를 그의 삶이 말해 줍니다.
그는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었습니까?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고 오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30세 전 부터 중병에 시달려 교수직을 사임했고 시력을 거의 잃었으며 길에서 쓰러진 뒤 그 자랑하던 정신능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정신병으로 십년을 투병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며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싸우기엔 너무 늙었다’
우리는 죽음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은 우리를 가둬두지 못하고 영광스런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니체가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여전히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주셨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게 하셨고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마지막 날 우리를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처럼 다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오늘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주셔서 험하고 의지할 곳 없는 세상에서 우리 주님의 손을 잡고 죽음도 두렵지 않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살게 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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