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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 비유(마태복음20장1절-16절)
남수연 2013-03-05 추천 0 댓글 0 조회 426

오늘은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비유 중 하나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천국이야말로 장차 우리의 영원한 생을 의탁하고 영원히 거하게 될 곳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지금처럼 사람들의 관심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데 있고 천국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만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에게 천국을 일깨워 주시고 천국을 상속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시작하실 때 중점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주님은 천국을 설명하실 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말씀하시려니 당연히 이 땅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설명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주님의 설교형태를 비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설교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쉽습니다.

오늘 말씀도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짧은 비유 속에는 전달하려는 의미가 쉬우면서도 명료하게 드러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깊이 곱씹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영적인 진리들이 고구마 캘때 처럼 줄줄이 딸려 나옵니다.

사실 이 포도원 품꾼 비유가 많이 들어서 쉬운 내용 같지만 예수님의 난해한 3대 비유 중에 속합니다.

‘열 처녀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 와 함께 오늘 비유도 예수님의 본래 의도를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좀 보시는 분들은 이 비유를 읽으면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뭔가 석연치 않고 아귀가 꽉 들어맞은 것 같은 해석이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에서도 하나님께서 오늘 충분히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래저래 힘든 생활로 지친 우리 모두에게 오늘 천국비유를 통해 신나는 여름휴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실재적인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읽은 대로 한 포도원을 가진 주인이 품꾼을 구해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 번에 직원을 채용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시간으로 바꾸면 새벽6시, 9시, 낮12시, 그리고 오후5시에 각각 일꾼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 보냅니다.

유대인의 통상 노동시간은 당시 새벽6시부터 저녁6시까지였습니다.

주인은 먼저 새벽6시에 일꾼을 고용하며 당시 통용되던 일용직 임금인 일 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요즘으로 하면 한 칠팔만원 정도 되겠죠.

그리고 그 이후에 고용한 사람과는 품삯을 정하지 않고 그냥 상당한 임금을 주겠다고 데려옵니다.

하루와 시간단위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칼같이 임금을 계산하는지 모릅니다.

일과가 끝난 저녁에 주인은 일꾼들의 품삯을 나누어 주는 데 이상하게 늦게 온 사람부터 줍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들어 와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일 데나리온을 다 주는 것입니다.

받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임금을 받으려고 둘러있던 사람들의 눈이 갑자기 번쩍 띄었겠죠.

각자가 엄청난 속도로 자기가 받을 돈을 머리 속에서 계산하고 입에 침을 삼켰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게 마지막 사람까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고 청지기는 지갑을 닫아 버립니다.

아마도 5시에 들어온 사람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실망감으로 기분이 상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가운데 제일 핏대가 오른 사람은 물론 새벽6시에 들어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불만을 포도원주인에게 쏟아놓습니다.

어떻게 늦은 저녁 서늘한 때 들어 와 한 시간 일한 사람하고 새벽부터 일하고 뜨거운 뙤약볕을 견딘 우리와 똑같이 주냐는 것이죠.

그 사람도 나름 상식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계약한 돈은 정확하게 받았으니 더 달란 소린 못하고 어떻게 저 사람을 나와 똑같은 금액을 주냐는 것입니다.

이건 내 수고와 노력을 무시하고 내 인격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어찌보면 이 사람이 그럴 만 하다는 동정심도 좀 들죠?

그러면 제자들처럼 우리들도 이 비유에 딱 낚인 것입니다.

포도원주인이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품삯을 나누어 준 것은 의도적으로 이런 사람들의 속내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죠.

그 때 포도원주인의 지극히 침착한 음성이 이 비유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줍니다.

친구여,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사람도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 비유설교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있으시겠죠?

그러려면 이 말씀을 꺼내시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면 좀 더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은 본문의 앞 장에 나와 있는 데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베드로의 예수님을 따른 보상에 대한 질문입니다.

먼저 부자 청년의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이 비유의 목적은 구원관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밝히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자력구원에 대한 오인을 지적합니다.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서 구원에 도달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겐 이렇게 일정한 행위를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 더 잘 이해되고 더 잘 받아들여집니다.

불교에서처럼 속세를 다 포기하고 도를 닦아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큰 반감을 갖지 않습니다. 덕을 쌓아서 복받는 것 쉽게 받아들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남이 해놓은 십자가의 구속을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것 처럼 인간에게 황당하게 들리는 게 없습니다.

아마 이런 저런 조건을 다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면 기독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훨씬 많았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해 절대적인 진리를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고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눈꼽 만큼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 지키지 않는 것은 멸망이란 공식을 갖고 있던 유대인에겐 졸도할만한 선언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세금징수원 출신이었던 마태의 귀에도 이 이상한 주님의 포도원 설교가 포착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관심 있는 것을 더 잘 듣기 마련이죠.

돈과 관련 된 직업을 가졌던 마태는 포도원주인의 이상한 계산법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하루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똑같이 하루 품삯을 준다는 것은 이 세상 경제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도 이상합니다.

오늘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고 그 포도원주인 참 자비로운 사람이네 하는 생각이 드는 분 있습니까?

그건 그동안 설교를 들어서 그런 것이고 처음 읽으면 누구나 다 그 주인 참 경우도 원칙도 없이 이상하게 포도원을 경영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자연의 법칙을 주셨잖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심어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거두는 게 더 자연스럽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이 법칙을 적용할 수가 없는게 문제입니다.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심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죠.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들으면 싫은 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 구원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 나온 우리들 중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있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너무 잘 알잖아요?

어쩌다 보니 여기 이렇게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되었죠.

수백번은 세상으로 돌아갔을 우리를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의지로 믿고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인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된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의 모습을 유심히 보십시오.

그는 품군에게 포도원 일을 시키려는 목적보다 오히려 품꾼을 얻어 한 데나리온씩을 나눠주려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주인이 품꾼을 부르고 자기의 뜻대로 그들의 노력에 관계없이 동일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노력과 관련 없이 똑같이 받는 구원은 뭔가 부당하다는 율법적인 동기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받는 상급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것은 두 번째 로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비유설교를 시작하신 이유가 부자청년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너희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켜라 말씀합니다.

그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가 가난한 그 시대에 그렇게 부자인 것은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지킨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직 네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그 많은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다음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부자청년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합니까?

그가 재산이 많아 근심하고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그냥 자기가 그동안 지킨 율법으로 구원받을 생각으로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떠난 것입니다.

아무렴 돈을 지키다 지옥 갈 생각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모습을 통해 유대인들이 신봉하던 그 율법으로는 결코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간 뒤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눕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 할 수 없기에 사람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만 구원을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좀 잘 믿거나 더 진지하게 믿거나 기도를 더 많이 하고 더 성숙한 믿음이 있다고 다른 사람의 구원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노동자의 생명과도 같은 이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동일하게 주어지는 구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할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에게는 이런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노력이 없이 구원을 주시는 것이라면 뭐하러 우리 민족에게 율법을 주셔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게 했냐는 것이죠.

그게 새벽6시에 들어와서 일한 일꾼의 불평일 수 있고 앞장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불만일 수 있습니다.

과연 새벽 여섯 시에 들어온 사람이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피해자일까요?

인력시장을 아십니까?

지금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역전 근처 허름한 동네에 가면 인력이라고 써 붙인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걸 볼 때마다 왠지 인생의 애환이 느껴지며 마음 한켠이 짠해지는 느낌이 들곤하죠.

새벽 시장통에 모인 남루한 가장들은 드럼통 모닥불 주변에 모여 봉지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시름에 잠긴 눈으로 초조하게 일거리를 기다립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도 인력시장엔 5백명 넘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일감을 얻어 나가는 사람은 백 명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먹고사는 문제가 치열했던 예수님 당시 하루 품꾼으로 채용되지 않으면 온 식구가 굶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질병이나 빚 같은 이중 삼중의 생활고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른 새벽에 나가자마자 바로 채용 된 일군들은 안도의 숨을 쉬며 기쁜 마음으로 포도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사람이 일거리가 있고 직장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작년에 대학졸업생의 20%만이 취업되었다는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시대를 풍자해서 청년실신시대라고 한다고 합니다.

청년들이 실직에 신용불량자까지 된다는 슬픈 신조어입니다.

이른 아침 채용 된 사람은 최소한 당장 먹을 식구들의 빵과 음식을 걱정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마음 편하게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일이 없어 장터에서 하루 종일 놀고 있었던 그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그날 품값을 받아가지 못하면 자식들이 끼니를 때울 수 없는 절박한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마감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어스름한 저녁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터를 서성이고 있었겠습니까?

주인의 눈에 이들이 불쌍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비유에서 이런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선하신 하나님이란 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렇게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약할 때도 반드시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새벽6시 부터 장터로 나간 주인을 보십시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시간마다 장터를 부지런히 왕래하며 품군을 불러들입니다.

때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보호받으며 하나님의 포도원을 위해 일하고 완벽하게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들이죠.

아직도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고충을 생각해 보셨나요?

죽음과 내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불안하고 두려울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위로와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 빈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눈에 그들이 희희낙락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인생의 밤이 되었을 때 손에 쥔 것이 없는 가련하고 궁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아무 것도 한 일도 없이 구원받음에 진정한 감사가 있길 원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봉사, 헌신 이런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에 한 터럭의 공력도 되지 못합니다.

구원에 대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 진리가 이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오직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주님이 고난 받으셔서 모든 값을 치르신 것을 믿고 확신가운데 더욱 감사가 충만한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다음 이 비유는 구원받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설교의 앞 부분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자기의 보상문제를 물어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의 시기적인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날이 가까이 왔고 많은 제자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예수님을 떠나고 있을 때입니다.

잘 안되는 집의 왠지 썰렁해지는 분위기 아시죠?

회사가 잘 안되는 분위기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슬금슬금 다른 직장으로 옮길 생각을 갖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런 분위기에선 둘 중 하나입니다.

기회를 봐서 더 난처한 일을 당하기 전에 얼른 떠나거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남아서 떠난 사람을 속으로 경멸하고 자기의 헌신적인 행동에 대해 스스로 높은 평가하며 위안하는 것이죠.

이 부자 청년을 곁에서 다 지켜 본 베드로가 불안감을 느끼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의 의중을 읽을 수 있으시겠죠?

이 말씀에 주님께서 명료하게 헌신에 대한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런데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나서 오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의 헌신에는 상급이 있지만 어떤 헌신이냐에 따라 먼저 될수도 있고 나중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헌신에도 잘못 된 관점과 보상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어린 딸이 이 말씀을 읽고 아빠, 여기 나온 분은 하나님하고 좀 다른 것 같아. 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평하고 정의롭고 타당하신 하나님의 이미지하고 좀 다르다는 것을 아이도 느꼈다는 말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던 제자들은 항의하는 일꾼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 아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포도원 주인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있다는 것과 늦게 들어온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죠.

품꾼의 불만 섞인 말속에 딱 이 두 가지가 표출되지 않습니까?

포도원 주인에 대한 원망과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대우를 하냐고 말하지요.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일군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함께 하는 성도들이 보상을 기대하는 봉사나 비교의식이나 형제에게 차가운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터에서 베드로가 나는 저들과 다르다며 가졌던 우월감과 현세에서 그것을 인정받고 보상받으려는 헌신이라면 반드시 실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일했지만 나중이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다 새벽6시 일꾼 증후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율법을 지키느라 새벽부터 수고와 더위를 견딘 바리새인들은 뒤늦게 예수님의 은총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우는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비유 속 품꾼처럼 시험에 들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먼저 택함을 받았지만 이방인인 우리들이 먼저 구원의 은총을 받았죠.

그런데 제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개척교회 목사들은 대형교회 목사들을 보면 그냥 씁쓸해지지만 개척한지 1년 밖에 안되었는데 백명으로 부흥했다는 소리 들으면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게 있습니다.

이게 다 새벽6시일꾼 증후군입니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이 잘되는 건 절대 못보겠다는 것이죠.

나는 새벽6시부터 남보다 더 고되게 수고하고 한낮의 더위와 열기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 데 힘들이지 않고 잘되는 사람보면 불공평한 하나님이 미워집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새벽6시부터 고생한 일군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시간은 저녁5시입니다.

그런 착각으로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수고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보다 과대평가 됩니다.

사람에게 마땅한 인정을 못 받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슬그머니 원망이 생기고 시험에 듭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의 조사 결과 목사들의 가장 큰 불만은 내가 이만큼 섬겼는 데 성도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큰 불만을 물으니 목사님이 고생하며 봉사한 걸 알아주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다 새벽6시일꾼 증후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포도원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하신 분이십니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 일당을 줄 능력이 있는 포도원주인처럼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십니다.

포도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주인이 다 알아서 해줍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받을 것을 따지고 비교하고 그런 건 경쟁해야 얻을 수 있을 때 그런 것이지 모든 게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뭐하러 그러겠습니까?

부요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쁨으로 만족하게 일하는 곳이 하나님나라고 그럴 때 교회는 이 땅에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댓가를 바라고 계산을 하고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마귀는 그런 마음을 시험하고 거기에 실족한 영혼은 과거에 아무리 열심을 냈다 해도 결국 그 믿음에서 나중으로 밀려나는 것이죠.

베드로가 그걸 계산하고 따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이 체포되고 보상이 물거품이 된 것 같게 되자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며 실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는 주님의 포도원에서 감사하게 일할 때 결코 그 상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자에게 준 냉수 한 그릇도 주님은 결코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우리가 나를 보내신 이곳에서 힘써 주님을 섬길 때 반드시 축복해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또 우리 성도님과 가정들이 그렇게 복을 받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산하지 않아도 감사와 기쁨으로 충성되게 주님을 좇으면 알아서 복을 주시고 자손도 반드시 잘되게 해주십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영0목사님의 할아버지께서 북한에서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이북에 여러 교회를 세웠고 공산화가 될 때 다들 남쪽으로 내려갔는 데 교회를 지키시겠다고 남아있다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후임자로 기라성같은 많은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하나님이 순교자의 후손인 이목사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물론 큰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그만큼 무거운 짐이기도 하지만 누가 봐도 확실한 축복이죠.

우리가 충성하면 우리 자식들이 축복을 받는 것은 검증 된 사실입니다.

시편 37장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 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천국비유에서 우리의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포도원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청년들 직업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부르실 때 우리의 일할 터전을 주시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사역자들에겐 헌신할 사역지를 주시고 평신도들에겐 섬길 교회를 주시고 또 일해서 먹고 살 일터를 주셔서 거기서 구원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얼마간의 시간은 앞으로 내세에서 영원한 삶에 비교하면 얼마나 짧습니까?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 세월을 영원한 천국을 위해 준비하고 일하는 기회로 삼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과거의 즐거움은 지나가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아무리 행복했던 일들도 사랑했던 감정도 자랑스럽던 순간도 시간이 지난 지금 희미하게 퇴색 되고 느낌조차도 없습니다.

건강한 근육질도 아름다운 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과거에 한 미모하셨을 성도님들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가 들면 내게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추억속의 사진 한 장 남을 뿐입니다.

지나간 모든 즐거움은 현재 내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를 사로잡은 세상의 재미도 쾌락도 몇 년 뒤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수고했던 헌신과 경건의 노력과 하나님과 누렸던 기쁨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지금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천국에 까지 가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보화를 천국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일터에서 할 일은 매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며 그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포도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일의 크고 작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어느 일터이건 나를 그 곳에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일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기쁨으로 충성되게 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넓은 지경을 허락하시고 더 좋은 결실을 거두도록 축복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불신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헌신하는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봐주십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값으로 따질 수도 없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길 원합니다.

또 먼저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는 아직 주님의 포도원인 교회로 들어오지 못한 빈궁한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기길 원합니다.

빈궁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은 구원입니다.

우리를 보내신 삶의 현장에서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사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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