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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마태복음11장28절-30절)
남수연 2012-11-24 추천 0 댓글 0 조회 779
오늘 우리교회의 초청을 받고 귀중한 시간을 내서 참석해 주신 분들을 환영하고 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까지 오시게 된 것은 은혜와 축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실 때 위로와 평안이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들 인생의 현주소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수고롭고 고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우리 인생을 도와주시려는 예수님의 진실한 초청이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게 무엇인지를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째는 인간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인생이 참 수고롭지 않으십니까?

지난 한 주도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 시간들을 보내고 이렇게 지친 마음으로 하나님아버지 앞에 나오셨는지요.

사람들이 가장 기분이 좋은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조사했더니 무엇일 것 같습니까?

기분좋다,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이런 게 아니라 홀가분하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짐에 짓눌려 살고 있는 지 말해주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기시고 홀가분한 안식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조선시대 풍속을 아주 실감나게 그린 김홍도란 화백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함으로 그들의 고통을 오히려 가볍고 따뜻하게 보려는 탁월한 화가죠.

그의 작품 중에 ‘행상’ 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행상 가족의 모습인데 고단한 인생을 그림 하나에 얼마나 잘 표현해 놓았는지 모릅니다.

보기에도 행색이 남루한 남편의 등지게엔 술통 같이 보이는 나무통이 무겁게 얹혀 있습니다.

큼직한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무게에 못 이겨 고개가 약간 기울어진 아내의 등에는 곤히 잠든 젖먹이가 업혀있습니다.

아이를 먼저 업고 그 위에 저고리를 입은 모습에서 긴 행상에 젖먹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보호하려는 모정이 엿보입니다.

아이를 업고 옷을 입었으니 엄마는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사랑의 짐이 되는 지도 예리하게 그려낸 것이죠.

부부는 서로 행상을 떠나기 위해 막 헤어지려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남편은 걱정스런 눈길로 무언가를 아내에게 당부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몸조심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각자의 등과 머리에 얹은 무거운 짐도 서글퍼 보이는 데 가난한 가족이란 이름에서 더 호된 인생의 애환이 느껴집니다.

혼자 가난한 것도 서글픈 데 가족이 다 가난하다는 것은 짐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지 않습니까?

이 행상부부의 모습에서 우리의 수고로운 인생을 보게 됩니다.

전 다큐3일이란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가끔 보는 데 거기 비춰지는 우리 서민들의 모습을 보면 옷과 시대만 바뀌었지 김홍도그림 속 고단한 인생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조선시대 행상부부나 마찬가지로 요즘도 보통 사람들은 맞벌이를 해야 겨우 먹고 살고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돌아 온 아이들은 혼자 문을 따고 들어올 때 마음 한 켠이 텅 빈 허전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허전한 아이는 냉장고 문을 먼저 열어보죠.

냉장고엔 빈 속을 채워 줄 마땅한 음식도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무 것도 채우지 못한 아이는 밖으로 나가 저와 똑같은 결핍한 애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는 일터로 내몰리고 사랑과 돌봄이 부족한 아이들은 밖으로 나돌며 자기들이 결코 상상하지도 원치도 않았던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현실입니다.

청년들의 삶도 고단하고 힘이 듭니다.

좋은 직장 얻어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키울 수 있으니 청년들 마음도 항상 쫒기고 힘듭니다.

취업의 문이 바늘구멍이잖습니까?

작년 중견기업의 평균 경쟁률이 55대 1이었다고 합니다.

비정규직과 단기 알바와 취업포기 등을 실업으로 가정할 경우 27%가 안정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며칠 전에도 취직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극단적인 길을 선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죠.

직업이 없는 다 큰 자식들을 부양하려고 은퇴 세대까지 다시 일터로 향하고 있는 게 요즘 실정입니다.

이런 소식들을 듣다보면 지금 그런대로 먹고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불안감이 엄습하고 돈을 더 벌어야 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죠.

그래서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도 행복의 조건을 묻는 질문의 1순위가 가족도 사랑도 아니고 돈이었다고 합니다.

가진 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만큼은 살아야 하고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오늘도 고된 수고의 짐을 지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삶에서 언제 이 수고가 끝이 나겠습니까?

평생 이 짐 못 내려놓습니다.

게다가 원치 않아도 내게 누군가가 짐을 지우는 게 인생의 이중고입니다.

저희가 요 앞 주유소에서 일하시는 나이 좀 드신 어르신을 전도하려고 가끔 얘기를 나누며 교제를 했습니다.

이번에 초청장을 드리니 주일에도 일을 하셔야 해서 못 오신다고 미안해 하시더군요.

그러시며 주유하고 난 짧은 시간에 속내를 털어놓으시는 데 부인께서 의료사고로 4번 척추가 절단되어 30년 째 하반신 마비로 살고 계시다는 겁니다.

아침에 식사 챙겨드리고 주유소에서 11시간을 일하고 들어가서 또 부인을 돌봐야 하니 교회를 나올 시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교회에 돌아와서 기도하는 데 이 가정이 생각이 나 눈시울이 젖더군요.

아무 문제없던 가정에 예기치도 않았던 사고가 생기는 게 인생입니다.

원치 않아도 그 짐을 지고 가야하는 것이죠.

이런 고단한 인생을 쉬게 해주겠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어깨가 축 쳐지게 얹혀 진 우리의 무거운 짐을 얼마나 내려주고 싶어 하시는 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 고민과 문제를 진실로 공감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힘들 때 도와 줄 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바로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진실한 친구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의 고민과 고충은 결국 우리 자신의 일일 뿐이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어디 아프다고 고통을 토로해도 사실 그걸 심각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14장 10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누군가의 무거운 짐과 고통이 보인다는 것은 그것은 사랑입니다.

연애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가끔 여자 친구 핸드백까지 대신 어깨에 매고 행복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기에 상대의 작은 짐조차 그만큼 민감해 지는 것이죠.

결혼하고 살다보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여행갈 때도 각자의 무거운 짐보따리는 각자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자매님들 잘 알아두십시오.

그래도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고통에 평생 민감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모정이 있습니다.

한 연예인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며 울었던 프로가 있었습니다.

치매 걸린 어머니 옆에 항상 사전이 펼쳐져 있었는 데 어느 날 잠든 자기 배에 이불 대신 사전을 덮어 놓으셨더라는 겁니다.

치매로 사전과 이불을 구별 못하지만 자식이 추울 때 덮어주는 사랑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이죠.

아무도 내 마음의 슬픔과 아픔을 알아주지 못해도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고통을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어깨에 얹혀진 무거운 짐을 안쓰럽게 보시며 도와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3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저는 성경말씀 중에서 하나님아버지께서 너희의 머리 털까지 세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내 삶이 힘에 부칠 만큼 고단하고 때로 억울한 일로 마음이 힘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감이 다 사라질 때도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을 훤히 알고 계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이렇게 내 형편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나를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실 수 있는 것이죠.

주님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죄의 무거운 짐과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오늘 내게 오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둘째로 살펴볼 것은 예수님께서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내게로 와서 쉬라고 하신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이 수고로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전능자가 있다면 한치 앞을 모를 우리 앞 날을 의탁하고 새털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인생 길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초청의 말씀을 믿을것이냐 말것이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데 달려있습니다.

일간지에 얼마나 많은 광고 전단지들이 딸려 옵니까?

요즘 같이 가정 경제가 어려운 때 재고 정리, 땡 처리, 공장도가 이런 광고에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죠.

광고대로 믿고 찾아갔다가 시간만 낭비하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돌아온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초청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이 예수라는 분은 누구이기에 온 인류를 향해 대담하게 구원의 초청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현대는 정보의 시대라고 하죠.

알아듣지도 못할 수많은 분야의 정보들이 미디어를 통해 떠돌고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을 접촉하다보니 사람들이 정보에 집중하지 않고 거의 흘려보냅니다.

정말 요긴한 정보인 데 그 분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다이어트에 대한 이런 정보 들어보셨나요?

스위스의 식품회사 네슬레의 실험 결과 식사 전에 30분간 껌을 씹으면 음식을 20%나 덜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입이 뭔가를 씹기만 해도 뇌는 음식을 먹는다고 간주해 허기가 가라앉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오늘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실제적인 분이라면 이 정보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실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12년 전에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는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나는 우주적 미스테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으론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하나님이 직접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이 사실을 계시해주시기 전에는 아무리 논리와 증거를 들어 설명해도 사실 납득이 안가는 게 신앙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믿을 만한 진실한 사람이었냐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을까?

그 분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당시 로마법정의 오심의 결과가 아니라 평소 말씀하신 대로 내 죄의 값을 치르시기 위한 계획적인 죽음이셨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의 진실 된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속의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들과 주님은 다르십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예수님을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것이죠.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기독교신자들은 못 믿어도 예수님은 믿을 만한 분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그냥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멘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닌 이상 어떤 인간도 이런 멘트는 날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정상적인 사람이 사실이 아닌 꾸며 낸 말을 유포했다면 그걸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의 죄를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 선포하신 결과로 얻으신 게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자기의 영광과 인기와 명예를 위해 꾸며 낸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말씀대로 오직 죄인들의 무거운 짐 진 인생을 풀어주시고 그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 오셨고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 따르기를 싫어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인류 최대의 희소식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으로 가지 전 까지 인간에게 참된 안식은 없습니다.

인생의 고민은 사실 매일 닥치는 곤고한 어려움에도 있지만 인생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의 답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냐는 것이고 도대체 내 인생의 종착역에는 무엇이 있냐는 것입니다.

목적지 없이 차를 몰고 나가보셨나요?

목적지가 없을 때 우리의 걸음과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막막합니까?

내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기에 죽음이 두렵고 문득 문득 인생이 무어냐는 허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건강염려증,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질병까지 우리 짐 위에 얹혀지는 것이죠.

인생의 해답을 발견한 사람들은 가장 무거운 인생의 짐을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시고 죽은 뒤에 영원한 천국으로 날 영접해 주신다는 이 믿음은 세상의 어떤 빽보다 우리를 든든하게 붙들어 줍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섬기게 될 때 알 수 없던 인생의 질문에 해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와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해 증언하신 분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파스칼은 확률이란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증언을 믿고 하나님을 믿었다가 죽었을 때 사실일지 거짓일지 확률은 반 반입니다.

또 믿지 않고 죽었더니 실제로 예수님 말씀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을 확률도 반 반입니다.

그때 가서 우리의 결정을 물릴 수가 없다면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내게 오라는 말씀을 믿고 나오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고 인생의 모든 수고를 쉬게 하시기 위해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고 마음이 무너지고 삶의 고통에 눈물 흘릴 때 이미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시고 기다리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인생에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산더미 같은 일상의 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등짐 하나 안지고 산책하듯 갈 수 있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알맞은 짐은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다루어주고 유혹과 세파 속에서 정신차리고 가도록 우리를 지켜주기도 합니다.

거센 물살이 흐르는 시내를 건널 때 무거운 돌멩이를 메고 건넌다고 하지 않습니까?

짐이 너무나 과중해 견디지 못하고 삶을 내려놓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 짐 없는 인생의 허무가 더 무거워 삶을 내려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네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나 이 수고와 고난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죄와 악으로 오염되고 양심을 버린 수많은 범죄자들로 들끓습니다.

지구 밖을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사회악과 우리의 악한 본성과 서로 뒤얽혀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나 혼자 무겁게 짊어졌던 세상 짐을 예수님이 함께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소에게 멍에 메는 것을 가리킬 때 어미 소와 함께 기구를 메게 해서 훈련시키는 모습이 떠오르죠.

어린 소는 멍에를 얹어놓기만 하고 밭은 어미 소가 가는 것입니다.

늦은 밤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서성대는 부모님들 모습을 가끔 봅니다.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한 부모는 얼른 가서 아이 어깨에 축 늘어진 가방부터 들어주게 되죠.

한 손엔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론 자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걷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볼 때 잠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인생의 이 무거운 짐들을 예수님께서 함께 지고 가시고 책임을 지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경험한 다윗이 시편 68장 19에 이렇게 고백하죠.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막연하게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의 짐을 해결해 주십니다.

다들 이 은혜를 경험하고 살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주시길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마태복음21장22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뭐 하러 의지할 것 안 되는 사람에게 구차한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우리가 힘들 때 저 사람이 날 좀 도울 수 있을까 눈치를 살피면 얼마나 비참하고 마음이 더 힘듭니까?

사람은 우리를 도울 힘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46장 3절에서 너희는 권세자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사야 41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문제를 알맞게 해결 할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환경을 통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주십니다.

눈 만 뜨면 우리에게 엄습하는 매일의 불안함과 부담스런 짐을 기도로 주님께 맡길 때 안심하고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 명상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 마음을 가볍게 하는 힐링프로그램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죠.

그러나 이런 명상의 힘도 위기 앞에서는 그 바닥이 송두리째 드러납니다.

위기가 아니라 작은 감정의 요동조차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게 연약한 인간입니다.

실제 전능한 힘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극진한 자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만이 삶의 위기를 이기고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멍에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겸손하게 지신 십자가 형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지라고 하시는 멍에는 이 사랑의 멍에입니다.

어떤 짐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질 만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려는 마음이 절박했기에 십자가를 지실만 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실제 십자가는 질만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인생의 짐도 질만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평생을 교사로 살다 뒤늦게 목회를 하니 얼마나 버거운 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님들을 사랑으로 섬기려는 마음으로는 질만 한 것입니다.

직장의 수고도 가사의 노동도 우리가 당장 벗어날 순 없지만 사랑으로 지면 우리가 지고 갈 만큼 쉽고 오히려 기쁨과 보람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랑을 가질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며 성경을 통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알수록 우리도 그 사랑의 멍에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부족함 없이 만족하게 하시기에 그 힘으로 인생의 짐을 질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우리의 누추하고 초라한 짐보따리 조차 진지하게 다루어 주십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죄짐과 꼬인 인생도 멸시치 않으시고 우리를 격려하시며 그 짐을 부릴 수 있게 인도하고 가르쳐주시는 주님께 나가 힘든 인생을 의탁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한없는 축복이고 평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무거운 인생의 짐을 벗어날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내 짐을 지시는 예수님의 진실 된 초청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이 벗겨지고 인생의 짐도 해결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배우면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 교수인 박재0장로 라는 분이 계십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눈 앞이 커튼을 친 것 처럼 뿌옇다고 말합니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뇌종양말기였습니다.

수도 없이 다른 사람의 단층촬영을 판독해 준 장로님이 아내의 뇌사진을 보며 말문이 막혔습니다.

의사로서의 자책감과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냐는 절망감이 몰려왔습니다.

수술을 통해 종양의 일부를 잘라내고 방사선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뇌종양 수술 후 생존기간은 평균 1년이라고 합니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처음으로 살려만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났고 아내는 식물인간 상태로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저녁이 되면 장로님은 아내의 곁을 지키며 하루 일어난 일과를 들려줍니다.때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를 업고 새벽기도에 나가 곁에 앉혀 놓고 기도를 드립니다.

지난 번 아들 결혼식에 장로님은 아내를 데려다 어머니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TV카메라를 향해 영상편지를 보내시는 장로님의 마지막 말은 나 금방 갈테니 당신 기다려요, 사랑해요 였습니다.

장로님은 아내의 투병생활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전에는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을 골라 아내로 맞았다고 생각했지만 긴 투병생활을 통해 그 아내가 얼마나 유일한 존재였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고난을 겪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무거운 짐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무의탁 노인들을 열다섯 분 정도 모시고 사랑의 집이라는 공동체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서울대병원으로 출퇴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웠기에 이런 아내를 진정 사랑할 수 있었고 15년 그 무거운 짐을 질만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현재입니다.

현재 내 곁에 있는 가족이고 친구이고 일터입니다.

미래가 행복할 거라는 망상을 좇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된 현재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맹아 학생들이 그린 자화상이란 작품을 보았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기의 얼굴을 그린 어린 학생들의 힘든 인생을 생각할 때 본다는 것도 듣는다는 것도 내 다리로 마음껏 걷는 다는 것도 얼마나 경이로운 축복인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눈 길 아래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의 일터에서 생활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마음껏 달리기도 하며 이 자유한 삶을 누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함께 지고 가시니 내일도 두려울 게 없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을 축복하시고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늘 함께 예배한 모든 분들께 영원히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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