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0~31)
남수연
201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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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사무엘상15장20절-31절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인 사울 왕의 뼈아픈 실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하나님으로부터 그 왕권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100% 완전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하나님은 왜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으셨을까
다윗은 더 심한 죄도 지었는 데 그의 왕위는 왜 견고하게 하셨을까
성경을 보며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 좀 다닌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고 이 말씀이 불순종을 경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불순종한 인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되고 있는 아말렉과의 전투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든 생명과 재물을 아끼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장의 3절을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라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전투명령을 전달합니다.
구약의 전쟁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성품은 동일하신 데 어떻게 저런 심한 명령을 내리시냐는 것이죠.
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출애굽기23장19절에 보면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말씀에 제가 엎어졌다는 거 아닙니까?
새끼가 먹고 자라야 할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아서 죽이는 것을 하나님이 차마 보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27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 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28절에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한낮 동물에 대해서도 창조주의 자비한 사랑을 보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말렉의 모든 젖먹는 아이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은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경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시다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렴 하나님 보다 더 선하고 자비합니까?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떤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뜻을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이 시대에 점령국의 모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때 그 시대에 맞는 방법을 쓰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구요.
가나안 정벌을 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돌려대라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그게 더 황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의미는 단지 나라 간의 권력과 정벌에 관련 된 전쟁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로부터 막 탈출한 이스라엘을 급습하여 공격합니다.
하나님은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시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17장1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아말렉의 씨를 말려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16절에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시며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선조들을 다 죽어 없어졌는 데도 하나님이 그 후손들까지 적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이죠.
아말렉 족속의 조상은 이삭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 장남인 에서 입니다.
그들의 할아버지 에서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인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긴 사람입니다.
아무렴 하나님의 축복이 팥 죽 한그릇만 못하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았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 에서의 후손이 아말렉입니다.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의 자손이면서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신앙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로 홍해를 가르고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용맹함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격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할 아무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에게 무슨 땅이 있길 합니까? 자신을 위협하길 합니까?
노예생활에서 막 탈출하여 나온 그들에게 이유 없는 공격을 가해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 있는 공격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이 그 배후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민수기24장17절에 보면 발람이란 사람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아주 먼 훗날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과 아말렉과 에돔을 완전히 멸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나온 한 별, 한 왕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멸망시킬 대상은 당연히 사단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아말렉의 배후에는 사단의 세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단의 세력을 하나님이 대적하여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할 일은 이 영적 전쟁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이 진멸해야 할 아말렉을 불순종하여 남겨둔 까닭에 이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란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되는 모르드개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유대인을 다 죽이라는 아하수에로왕의 칙령을 받아낸 간교한 사람입니다.
에스더3장10절에 보면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 자가 바로 아말렉 왕족 아각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유대의 어린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왕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현재의 네게브 사막이 있는 지역인 이도메네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서는 에돔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 이도메네아 사람들이 바로 에서의 후손 아말렉족입니다.
그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대적하여 멸종시키려 했고 심지어 우리 주님까지 죽이려 했던 사악한 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지 말고 가차 없이 진멸하라고 오늘 본문에서 사울왕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싸움이 바로 영적 싸움인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싸울 영적 전쟁에서 결코 타협하고 남겨두어서는 안될 죄의 세력과 사단의 세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왕은 왜 이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시험에서 미끄러진 것일까요?
사울왕이 하나님 앞에 처참하게 실패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의 실패의 첫 째 이유를 23절에서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20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 대로 했다고 큰 소리 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9절에 보면 성경은 날카롭게 그의 행위를 지적합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왕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지키는 흉내만 냈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전혀 몰랐습니다.
모르면 차라리 명령한 대로 순종하면 되지만 그는 그마저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의 자비의 영역 밖으로 스스로 떨어져 나갑니다.
그는 사실 사무엘상13장에서 이미 제사장의 직무인 제사를 자기 스스로 행한 일로 이스라엘의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양될 것을 통보받은 상황입니다.
그는 이번에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반드시 순종하여 과거의 불순종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뜻을 저버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결국 자기의 이익이과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좋은 것을 탈취하기에 급급하고 승리의 증표인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백성 앞에서 끌고 다닙니다.
자신의 전적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잇속을 차린 것을 은폐하려고 예배를 들먹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하려고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우상처럼 똑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임에도 자식의 대학 입시를 앞두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곧 자신이 믿던 미신 섬기는 것으로 돌아가더군요.
그러나 그 다음 해에 또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미신도 헛되다고 기독교고 점쟁이고 다 필요없다며 무신론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상 중 하나 처럼 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잘 이용해 내가 덕을 좀 보려는 것이죠.
우상을 사랑해서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더 나은 우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꿔 타는 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와 똑같다.
네 이익이 앞 설 때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처럼 섬기고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아닌 자기의 이익을 위한 우상 숭배였고 유일한 신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마음이 행위로 드러난 것이 순종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순종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죄인 된 우리를 위한 사랑이 십자가의 두려움을 이기시고 죽으시는 온전한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왕에게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셨다는 사랑의 증거가 얼마나 순종으로 나타납니까?
그가 전쟁할 때 보십시오.
하나님 올라갈까요? 말까요?
이번 싸움에 이길까요? 질까요?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계속 묻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무슨말입니까
바로 순종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하시는 복된 삶을 사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시고 좀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실제로 부르짖고 간구하고 난 후 단 몇 분 정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한번 조용히 하나님께 집중해 보십시오.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원과 다른 것을 말씀하실까봐 순간 조마조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죠.
우린 이렇게 순종할 준비가 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순종이 그리 무리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이들이 할 만한 것이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순종하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순종하라 하실 때 우리가 할 만한 것을 시키신다고 믿습니다.
순종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단연코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친근하게 나가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려는 착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그래 너 잘 걸렸다. 평생토록 후회하게 해주겠다.
네 모든 즐거움을 다 빼앗아 버리겠다
이러시리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 누굴 위해서이겠습니까?
제가 깨달은 건 순종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보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비로소 알게 되죠.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은 자꾸 자꾸 더 순종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반면 불순종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꾸 자꾸 불순종합니다.
불순종해 보십시오.
어쩐지 하나님이 나를 미워할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 선뜻 나가지지가 않는 걸 보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벗어나 심판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사람들이 가장 열광했던 가장 비 인간적인 경기가 검투사 경기입니다.
한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입니다.
그 경기가 왜 금지되고 사라졌는지 아십니까?
바로 한 사람의 순종의 결과입니다.
4세기에 텔라마쿠스라는 신실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순종했습니다.
그가 로마로 가서 본 것은 분노와 열기에 가득 찬 사람들이 무엇에 홀린 듯이 휩쓸려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인파에 밀려가게 된 곳은 콜롯세움이었습니다.
수만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검투사들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기에 앞서 황제 앞에서 외칩니다.
곧 죽게 될 우리는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그들은 죽을 때 까지 싸웁니다.
그는 귀를 막았지만 함성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외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멈추시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빈약한 모습의 수도사를 건장한 체격의 검투사가
희롱하며 치기 시작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멈추시오.
관중들은 죽이라고 함성을 지릅니다.
검투사의 날카로운 칼이 텔라마우스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피를 흘리고 죽어가며 그가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제발 멈추시오.
그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콜로세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모두들 쓰러져 있는 작은 그의 몸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사람 씩 그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마지막 검투경기였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존엄성을 잃고 짐승처럼 싸우다 죽어가게 하는 사단의 역사를 이긴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대단한 순종이 아니더라도 작은 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매 순간의 선택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울의 비극적인 종말은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을 앞세운 그의 선택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날마다 분별하여 순종함으로 영적, 육적인 축복 가운데 사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울이 실패한 두 번째 이유는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전쟁에서 그 전리품을 갖는 것은 보통은 승자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아말렉을 쳐서 승리하자 전리품을 챙기느라 혈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울왕이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한 개도 취하지 말라 했다면 당연히 백성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겠죠.
백성들의 축제 분위기를 깨뜨려 비난과 원망을 하나님 대신 자신이 받는 것이 두려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하나님 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의식했단 것이죠.
우리가 사람의 평판과 인기와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보다 그것을 더 우선에 둔 사람입니다.
그는 좀 지나치리 만큼 사람의 눈만을 의식합니다.
30절에 보면 왕위를 박탈 당한 비참한 상황에서도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만을 생각합니다.
사무엘을 붙잡고 매달리며 백성들 앞에서 같이 제사드리는 척 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지나치게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반면 항상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높이려 하는 양면성을 보이며 마음이 요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신봉할 대상도 두려워할 대상도 아닙니다.
사람의 인기와 칭송도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원했던 사울왕은 얼마나 가련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사울과 대조 되는 다윗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놀며 영광을 돌리느라 자기 바지 춤이 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즐거워 했다고 합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이기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사울 왕의 영을 이어받은 딸 미갈, 다윗의 아내는 어땠습니까?
사람 앞에 체면을 구긴 남편 다윗을 속으로 업신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 때 우리를 두렵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성령에 충만하여 말합니다.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면 실패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람이 아니고, 환경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 향해 두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 째 사울왕의 실패의 원인이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로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바로 여기에 모든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무엘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자기 죄를 사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 된 지식 속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을 믿어야만 됩니다.
인격적인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얼마나 시편에서 외쳐댑니까?
사울왕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데는 그가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3장 3절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변방에 방치되어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려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사울왕은 하나님에 대해 개인적인 관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들이 선지자를 가까이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조언을 받은 데 비해 그는 대 선지자 사무엘과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사울은 예배에 불충실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고 기도하는 일에 취미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 대해 성경은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하나님도 사울 왕을 버렸다는 뼈아픈 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왕의 실패에 그가 죽을 때 까지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등지고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걸어갔던 사울왕이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에 슬퍼하십니다.
35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후회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를 왕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고 후회하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은 후회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에 대한 하나님의 후회일지 모릅니다.
윌리암 톰슨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을 독백 형식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자유로운 우주, 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만들면 어떨까?
나의 신성을 가려서 피조물들이 자유롭게 살게 하면 어떨까?
그래도 그 피조물들이 나를 사랑할까?
나를 사랑하도록 프로그램을 입력하지 않았는데도 피조물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사랑할까?
내가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면 악이 이 세상에 찾아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텐데.
자유로운 인간들은 나의 뜻에서 멀리 떠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선으로 악을 이긴다면,
자유를 가진 인간들이 그때는 나를 사랑할까?
사울에게 왕의 옷을 입혀주시며 하나님은 그가 왕권으로 인해 타락해 가는 것을 근심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인 자유의지를 주시며 우리의 불순종을 걱정하셨듯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복종을 프로그래밍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기에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실패할 우리들을 위해 우리의 왕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순종하라
그러면 즉시 다음 것이 펼쳐질 것이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순종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더 많은 진리를 계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창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하루 하루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사울에게 명하신 전투가 영적 전투임을 기억하십시오.
작은 타협과 작은 불순종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을 주의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책 안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이면 안됩니다.
확신이 부족하시면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십시오.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가 오셔서 우리의 자녀 됨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사무엘상15장20절-31절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인 사울 왕의 뼈아픈 실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하나님으로부터 그 왕권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100% 완전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하나님은 왜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으셨을까
다윗은 더 심한 죄도 지었는 데 그의 왕위는 왜 견고하게 하셨을까
성경을 보며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 좀 다닌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고 이 말씀이 불순종을 경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불순종한 인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되고 있는 아말렉과의 전투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든 생명과 재물을 아끼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장의 3절을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라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전투명령을 전달합니다.
구약의 전쟁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성품은 동일하신 데 어떻게 저런 심한 명령을 내리시냐는 것이죠.
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출애굽기23장19절에 보면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말씀에 제가 엎어졌다는 거 아닙니까?
새끼가 먹고 자라야 할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아서 죽이는 것을 하나님이 차마 보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27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 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28절에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한낮 동물에 대해서도 창조주의 자비한 사랑을 보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말렉의 모든 젖먹는 아이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은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경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시다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렴 하나님 보다 더 선하고 자비합니까?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떤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뜻을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이 시대에 점령국의 모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때 그 시대에 맞는 방법을 쓰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구요.
가나안 정벌을 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돌려대라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그게 더 황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의미는 단지 나라 간의 권력과 정벌에 관련 된 전쟁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로부터 막 탈출한 이스라엘을 급습하여 공격합니다.
하나님은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시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17장1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아말렉의 씨를 말려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16절에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시며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선조들을 다 죽어 없어졌는 데도 하나님이 그 후손들까지 적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이죠.
아말렉 족속의 조상은 이삭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 장남인 에서 입니다.
그들의 할아버지 에서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인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긴 사람입니다.
아무렴 하나님의 축복이 팥 죽 한그릇만 못하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았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 에서의 후손이 아말렉입니다.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의 자손이면서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신앙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로 홍해를 가르고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용맹함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격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할 아무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에게 무슨 땅이 있길 합니까? 자신을 위협하길 합니까?
노예생활에서 막 탈출하여 나온 그들에게 이유 없는 공격을 가해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 있는 공격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이 그 배후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민수기24장17절에 보면 발람이란 사람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아주 먼 훗날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과 아말렉과 에돔을 완전히 멸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나온 한 별, 한 왕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멸망시킬 대상은 당연히 사단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아말렉의 배후에는 사단의 세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단의 세력을 하나님이 대적하여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할 일은 이 영적 전쟁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이 진멸해야 할 아말렉을 불순종하여 남겨둔 까닭에 이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란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되는 모르드개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유대인을 다 죽이라는 아하수에로왕의 칙령을 받아낸 간교한 사람입니다.
에스더3장10절에 보면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 자가 바로 아말렉 왕족 아각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유대의 어린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왕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현재의 네게브 사막이 있는 지역인 이도메네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서는 에돔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 이도메네아 사람들이 바로 에서의 후손 아말렉족입니다.
그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대적하여 멸종시키려 했고 심지어 우리 주님까지 죽이려 했던 사악한 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지 말고 가차 없이 진멸하라고 오늘 본문에서 사울왕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싸움이 바로 영적 싸움인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싸울 영적 전쟁에서 결코 타협하고 남겨두어서는 안될 죄의 세력과 사단의 세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왕은 왜 이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시험에서 미끄러진 것일까요?
사울왕이 하나님 앞에 처참하게 실패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의 실패의 첫 째 이유를 23절에서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20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 대로 했다고 큰 소리 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9절에 보면 성경은 날카롭게 그의 행위를 지적합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왕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지키는 흉내만 냈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전혀 몰랐습니다.
모르면 차라리 명령한 대로 순종하면 되지만 그는 그마저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의 자비의 영역 밖으로 스스로 떨어져 나갑니다.
그는 사실 사무엘상13장에서 이미 제사장의 직무인 제사를 자기 스스로 행한 일로 이스라엘의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양될 것을 통보받은 상황입니다.
그는 이번에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반드시 순종하여 과거의 불순종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뜻을 저버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결국 자기의 이익이과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좋은 것을 탈취하기에 급급하고 승리의 증표인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백성 앞에서 끌고 다닙니다.
자신의 전적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잇속을 차린 것을 은폐하려고 예배를 들먹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하려고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우상처럼 똑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임에도 자식의 대학 입시를 앞두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곧 자신이 믿던 미신 섬기는 것으로 돌아가더군요.
그러나 그 다음 해에 또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미신도 헛되다고 기독교고 점쟁이고 다 필요없다며 무신론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상 중 하나 처럼 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잘 이용해 내가 덕을 좀 보려는 것이죠.
우상을 사랑해서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더 나은 우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꿔 타는 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와 똑같다.
네 이익이 앞 설 때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처럼 섬기고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아닌 자기의 이익을 위한 우상 숭배였고 유일한 신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마음이 행위로 드러난 것이 순종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순종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죄인 된 우리를 위한 사랑이 십자가의 두려움을 이기시고 죽으시는 온전한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왕에게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셨다는 사랑의 증거가 얼마나 순종으로 나타납니까?
그가 전쟁할 때 보십시오.
하나님 올라갈까요? 말까요?
이번 싸움에 이길까요? 질까요?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계속 묻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무슨말입니까
바로 순종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하시는 복된 삶을 사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시고 좀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실제로 부르짖고 간구하고 난 후 단 몇 분 정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한번 조용히 하나님께 집중해 보십시오.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원과 다른 것을 말씀하실까봐 순간 조마조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죠.
우린 이렇게 순종할 준비가 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순종이 그리 무리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이들이 할 만한 것이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순종하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순종하라 하실 때 우리가 할 만한 것을 시키신다고 믿습니다.
순종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단연코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친근하게 나가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려는 착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그래 너 잘 걸렸다. 평생토록 후회하게 해주겠다.
네 모든 즐거움을 다 빼앗아 버리겠다
이러시리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 누굴 위해서이겠습니까?
제가 깨달은 건 순종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보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비로소 알게 되죠.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은 자꾸 자꾸 더 순종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반면 불순종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꾸 자꾸 불순종합니다.
불순종해 보십시오.
어쩐지 하나님이 나를 미워할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 선뜻 나가지지가 않는 걸 보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벗어나 심판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사람들이 가장 열광했던 가장 비 인간적인 경기가 검투사 경기입니다.
한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입니다.
그 경기가 왜 금지되고 사라졌는지 아십니까?
바로 한 사람의 순종의 결과입니다.
4세기에 텔라마쿠스라는 신실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순종했습니다.
그가 로마로 가서 본 것은 분노와 열기에 가득 찬 사람들이 무엇에 홀린 듯이 휩쓸려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인파에 밀려가게 된 곳은 콜롯세움이었습니다.
수만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검투사들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기에 앞서 황제 앞에서 외칩니다.
곧 죽게 될 우리는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그들은 죽을 때 까지 싸웁니다.
그는 귀를 막았지만 함성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외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멈추시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빈약한 모습의 수도사를 건장한 체격의 검투사가
희롱하며 치기 시작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멈추시오.
관중들은 죽이라고 함성을 지릅니다.
검투사의 날카로운 칼이 텔라마우스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피를 흘리고 죽어가며 그가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제발 멈추시오.
그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콜로세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모두들 쓰러져 있는 작은 그의 몸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사람 씩 그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마지막 검투경기였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존엄성을 잃고 짐승처럼 싸우다 죽어가게 하는 사단의 역사를 이긴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대단한 순종이 아니더라도 작은 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매 순간의 선택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울의 비극적인 종말은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을 앞세운 그의 선택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날마다 분별하여 순종함으로 영적, 육적인 축복 가운데 사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울이 실패한 두 번째 이유는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전쟁에서 그 전리품을 갖는 것은 보통은 승자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아말렉을 쳐서 승리하자 전리품을 챙기느라 혈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울왕이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한 개도 취하지 말라 했다면 당연히 백성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겠죠.
백성들의 축제 분위기를 깨뜨려 비난과 원망을 하나님 대신 자신이 받는 것이 두려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하나님 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의식했단 것이죠.
우리가 사람의 평판과 인기와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보다 그것을 더 우선에 둔 사람입니다.
그는 좀 지나치리 만큼 사람의 눈만을 의식합니다.
30절에 보면 왕위를 박탈 당한 비참한 상황에서도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만을 생각합니다.
사무엘을 붙잡고 매달리며 백성들 앞에서 같이 제사드리는 척 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지나치게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반면 항상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높이려 하는 양면성을 보이며 마음이 요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신봉할 대상도 두려워할 대상도 아닙니다.
사람의 인기와 칭송도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원했던 사울왕은 얼마나 가련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사울과 대조 되는 다윗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놀며 영광을 돌리느라 자기 바지 춤이 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즐거워 했다고 합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이기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사울 왕의 영을 이어받은 딸 미갈, 다윗의 아내는 어땠습니까?
사람 앞에 체면을 구긴 남편 다윗을 속으로 업신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 때 우리를 두렵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성령에 충만하여 말합니다.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면 실패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람이 아니고, 환경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 향해 두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 째 사울왕의 실패의 원인이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로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바로 여기에 모든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무엘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자기 죄를 사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 된 지식 속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을 믿어야만 됩니다.
인격적인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얼마나 시편에서 외쳐댑니까?
사울왕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데는 그가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3장 3절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변방에 방치되어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려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사울왕은 하나님에 대해 개인적인 관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들이 선지자를 가까이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조언을 받은 데 비해 그는 대 선지자 사무엘과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사울은 예배에 불충실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고 기도하는 일에 취미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 대해 성경은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하나님도 사울 왕을 버렸다는 뼈아픈 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왕의 실패에 그가 죽을 때 까지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등지고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걸어갔던 사울왕이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에 슬퍼하십니다.
35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후회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를 왕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고 후회하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은 후회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에 대한 하나님의 후회일지 모릅니다.
윌리암 톰슨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을 독백 형식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자유로운 우주, 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만들면 어떨까?
나의 신성을 가려서 피조물들이 자유롭게 살게 하면 어떨까?
그래도 그 피조물들이 나를 사랑할까?
나를 사랑하도록 프로그램을 입력하지 않았는데도 피조물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사랑할까?
내가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면 악이 이 세상에 찾아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텐데.
자유로운 인간들은 나의 뜻에서 멀리 떠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선으로 악을 이긴다면,
자유를 가진 인간들이 그때는 나를 사랑할까?
사울에게 왕의 옷을 입혀주시며 하나님은 그가 왕권으로 인해 타락해 가는 것을 근심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인 자유의지를 주시며 우리의 불순종을 걱정하셨듯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복종을 프로그래밍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기에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실패할 우리들을 위해 우리의 왕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순종하라
그러면 즉시 다음 것이 펼쳐질 것이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순종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더 많은 진리를 계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창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하루 하루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사울에게 명하신 전투가 영적 전투임을 기억하십시오.
작은 타협과 작은 불순종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을 주의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책 안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이면 안됩니다.
확신이 부족하시면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십시오.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가 오셔서 우리의 자녀 됨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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